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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때 산성 수축을 주관한 승려에게 내려 준 문서. | 조선 선조 때 산성 수축을 주관한 승려에게 내려 준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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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왕명에 따라 근왕(勤王)의 기치를 내걸고 전쟁에 참여한 의승들은 명나라 원군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청주성 작전, 평양성 전투, 행주대첩 등 여러 전투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선조를 호위하는 등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명나라 군대가 도착해 전쟁에 참여하면서부터 의승군의 역할에 변화가 생겼다.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점차 군량을 수송하거나 산성을 축조하는 일 등에 동원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이다. | 임진왜란 당시 왕명에 따라 근왕(勤王)의 기치를 내걸고 전쟁에 참여한 의승들은 명나라 원군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청주성 작전, 평양성 전투, 행주대첩 등 여러 전투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선조를 호위하는 등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명나라 군대가 도착해 전쟁에 참여하면서부터 의승군의 역할에 변화가 생겼다.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점차 군량을 수송하거나 산성을 축조하는 일 등에 동원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이다. | ||
− | 조정에서는 이러한 승군을 통솔하는 승장(僧將)을 [[총섭(摠攝)]]에 임명하였다. 원래는 선종판사(禪宗判事)와 교종판사(敎宗判事)에 제수하려 하였으나 선종과 교종이라는 명칭을 빌미로 선교양종( | + | 조정에서는 이러한 승군을 통솔하는 승장(僧將)을 [[총섭(摠攝)]]에 임명하였다. 원래는 선종판사(禪宗判事)와 교종판사(敎宗判事)에 제수하려 하였으나 선종과 교종이라는 명칭을 빌미로 선교양종(禪敎兩宗) 제도가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커, 중앙에 [[도총섭(都摠攝)]]을 두고 각 도에 총섭 2명씩을 두어 승군을 이끌게 하였다. 따라서 총섭은 승군의 지휘관이자 동시에 불교 교단을 이끄는 존재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산성의 축조 및 수리는 승려들을 동원해 총섭의 지휘 아래 시행하게 하였다. |
− | 1593년(선조 26) 이후에는 왜군을 남쪽으로 밀어내고 수복한 지역에 서둘러 성을 수축하는 등 향후 전쟁에 대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 당시 축성에는 주로 승군이 동원되었는데, 그에 따라 승군을 효율적으로 통솔할 수 있는 의승장들이 축성을 주관하였다. 1594년(선조 27)에 총섭 유정(惟政)의 지휘 아래 수축된 [[악견산성(岳堅山城)]]·이숭산성( | + | 1593년(선조 26) 이후에는 왜군을 남쪽으로 밀어내고 수복한 지역에 서둘러 성을 수축하는 등 향후 전쟁에 대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 당시 축성에는 주로 승군이 동원되었는데, 그에 따라 승군을 효율적으로 통솔할 수 있는 의승장들이 축성을 주관하였다. 1594년(선조 27)에 총섭 유정(惟政)의 지휘 아래 수축된 [[악견산성(岳堅山城)]]·이숭산성(李崇山城)·용기산성(龍起山城)·귀성산성(龜城山城) 등이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이때 장성현감이귀(李貴)는 법견(法堅)에게 장성의 [[입암산성(笠巖山城)]] 수축을 주관하게 하면서, 그를 부총섭에 임명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군대를 이끌고 왜적을 토벌한 것도 아닌데 산성 하나를 수축하는 승려를 총섭에 임명하고 [[교지(敎旨)]]와 인자(印子)까지 내려 줄 수는 없다며 반대하고, 그 대신 대선첩문을 작성하여 내려 주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02027_003 『선조실록』 27년 2월 27일]). 이러한 조처는 선교양종이 이미 혁파되어 법제적으로는 [[승직(僧職)]]이 있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전쟁이라는 비상시국에 처하게 되면서, 승군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왕명으로 일종의 승직이 내려졌음을 말해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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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30일 (화) 14:3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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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대선첩문 |
한글표제 | 대선첩문 |
한자표제 | 大選帖文 |
관련어 | 총섭(摠攝), 의승(義僧), 산성(山城), 임진왜란(壬辰倭亂), 입암산성(笠巖山城), 법견(法堅), 승역(僧役)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강호선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대선첩문(大選帖文)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27년 2월 27일 |
조선 선조 때 산성 수축을 주관한 승려에게 내려 준 문서.
개설
대선첩문(大選帖文)은 임진왜란 당시에 산성 수축(修築)을 주관하는 승려에게 내려 준 일종의 임명장이다. 승군(僧軍)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총섭(副摠攝)에 임명하는 대신 대선첩문을 내려 주었다.
내용 및 특징
임진왜란 당시 왕명에 따라 근왕(勤王)의 기치를 내걸고 전쟁에 참여한 의승들은 명나라 원군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청주성 작전, 평양성 전투, 행주대첩 등 여러 전투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선조를 호위하는 등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명나라 군대가 도착해 전쟁에 참여하면서부터 의승군의 역할에 변화가 생겼다.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점차 군량을 수송하거나 산성을 축조하는 일 등에 동원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승군을 통솔하는 승장(僧將)을 총섭(摠攝)에 임명하였다. 원래는 선종판사(禪宗判事)와 교종판사(敎宗判事)에 제수하려 하였으나 선종과 교종이라는 명칭을 빌미로 선교양종(禪敎兩宗) 제도가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커, 중앙에 도총섭(都摠攝)을 두고 각 도에 총섭 2명씩을 두어 승군을 이끌게 하였다. 따라서 총섭은 승군의 지휘관이자 동시에 불교 교단을 이끄는 존재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산성의 축조 및 수리는 승려들을 동원해 총섭의 지휘 아래 시행하게 하였다.
1593년(선조 26) 이후에는 왜군을 남쪽으로 밀어내고 수복한 지역에 서둘러 성을 수축하는 등 향후 전쟁에 대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 당시 축성에는 주로 승군이 동원되었는데, 그에 따라 승군을 효율적으로 통솔할 수 있는 의승장들이 축성을 주관하였다. 1594년(선조 27)에 총섭 유정(惟政)의 지휘 아래 수축된 악견산성(岳堅山城)·이숭산성(李崇山城)·용기산성(龍起山城)·귀성산성(龜城山城) 등이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이때 장성현감이귀(李貴)는 법견(法堅)에게 장성의 입암산성(笠巖山城) 수축을 주관하게 하면서, 그를 부총섭에 임명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군대를 이끌고 왜적을 토벌한 것도 아닌데 산성 하나를 수축하는 승려를 총섭에 임명하고 교지(敎旨)와 인자(印子)까지 내려 줄 수는 없다며 반대하고, 그 대신 대선첩문을 작성하여 내려 주었다(『선조실록』 27년 2월 27일). 이러한 조처는 선교양종이 이미 혁파되어 법제적으로는 승직(僧職)이 있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전쟁이라는 비상시국에 처하게 되면서, 승군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왕명으로 일종의 승직이 내려졌음을 말해 준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편,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두산동아, 2007.
-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신구문화사, 2010.
- 이장희, 「임진왜란 중 의승군의 활동에 대하여」, 『사명당 유정』, 지식산업사, 200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