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분재(盂蘭盆齋)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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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우란분재 |
한글표제 | 우란분재 |
한자표제 | 盂蘭盆齋 |
동의어 | 우란분회(盂蘭盆會) |
관련어 | 백종(白終), 하안거(夏安居), 자자(自恣), 천도재(薦度齋), 합동천도의식(合同薦道儀式), 국제공불재승대회(國際供佛齋僧大會), 우란분절(盂蘭盆節), 백중(百衆)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의식·행사 |
집필자 | 이성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우란분재(盂蘭盆齋)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7년 7월 14일 |
지옥에 떨어진 조상의 영혼을 천도하기 위해 승려들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의식.
개설
『불설우란분경(佛說盂蘭盆經)』에 바탕을 두고 있는 우란분재(盂蘭盆齋)는 음력 7월 15일에 거행된다. 하안거(夏安居)를 마치고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는 자자(自恣) 의식을 행한 500명의 승려들에게 음식을 공양하여, 지옥에 빠진 조상을 그 공덕으로 천도하는 의식이다. 인도와 중국에서 널리 행해졌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에 이미 여러 차례 개설되었다. 조선초 왕실에서는 우란분재의 전통이 이어졌으나 15세기 말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그 전통이 계속 이어졌으며, 조선중기 이후에는 사찰 단위의 합동 천도 의식으로 설행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사찰에서 시행하고 있다.
연원
『불설우란분경』은 줄여서 『우란분경』이라고도 한다. ‘우란분’은 도현(倒懸) 즉 ‘거꾸로 매달린다’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ullambana’를 음역(音譯)한 것이다. 이는 죽은 이의 영혼에 음식을 바쳐 거꾸로 매달린 사람의 고통을 구해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란분경』에 따르면, 수행을 통해 여섯 가지 신통력을 얻은 부처의 제자 목련(目連)이 어머니의 은혜를 갚기 위해 하늘눈[天眼]으로 죽은 어머니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악행을 많이 한 목련의 어머니는 아귀도(餓鬼道)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굶주려 피골이 상접한 모습을 보고 목련이 신통력으로 음식을 가져다주었으나,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음식이 새까맣게 타서 먹을 수가 없었다. 목련이 비통해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석가모니는, 여름 안거가 끝나는 음력 7월 15일에 스스로의 잘못을 고백하는 의식인 자자(自恣)를 행한 승려들에게 100가지 음식과 5가지 과일을 우란분(盂蘭盆)에 담아 향과 촛불을 켜서 공양하라고 일러 주었다. 그리하면 과거 7세 부모와 현세의 부모 가운데 재앙에 빠진 자가 있으면, 현재의 부모는 무병장수하고 복락을 누리며, 돌아가신 조상은 고통에서 벗어나 천상에 태어나 끝없는 복락을 누리게 된다고 하였다. 목련은 이 가르침에 따라 우란분재를 행하여 어머니를 아귀도에서 구제하였다.
음력 7월 15일에 공양을 올리는 이유는, 승려들이 석 달의 하안거 기간에 수행 정진 하는 동안 의심나던 일들을 털어놓고 잘못을 고백하여 깨끗한 공덕이 충만한 날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면에서는 많은 승려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므로 공양하기에 적합하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변천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무제 때 동태사(同泰寺)에서 처음으로 시행된 이래 역대 제왕들에 의해 여러 차례 개설되었다. 특히 당나라 중기 이후에는 민속적인 행사로 정착되어, 승려와 일반인들이 함께 우란분재를 행하고 공양을 올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고려시대 이전의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고려시대에는 수차례 개설되었는데, 1356년(고려 공민왕 5)에는 내전(內殿)에서 설행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의 우란분재는 모두 부모를 비롯한 조상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으로, 7월 15일에 열렸다.
조선시대의 경우 국가적인 차원에서 우란분재를 설행한 기록은 1398년(태조 7)에 흥천사(興天寺)에서 개설했다는 기사가 유일하다(『태조실록』 7년 7월 14일). 따라서 조선전기의 우란분재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 다만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를 통해 그 모습과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7월 15일을 풍속에서는 백종(百種)이라 부르는데, 승가에서는 100가지의 꽃과 과일을 모아 우란분재를 베푼다. 서울의 비구니 사찰에서 더욱 심하다. 부녀들이 많이 모여들어 쌀과 곡식을 바치고, 돌아간 조상의 영혼을 위해 제사를 지낸다. 때로는 승려들이 길가에 탁자를 놓고 거행하는 경우도 있다. 지금은 모두 금하게 하여 일부에 그친다."고 하였다.
국가 행사로서의 우란분재는 15세기 말에 폐지되었지만, 민간에서는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전승되었다.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서, "7월 15일에 경성에서는 부녀들이 절에 나아가 영패를 설치하고 향을 피우고 공양함으로써 부모에게 제사를 지낸다. 제사가 끝나면 영패를 태우고 우는 사람이 많다."고 하였다.
오늘날 전국의 사찰에서는 우란분재를 불교의 5대 명절 가운데 하나로 꼽으며, 음력 7월 15일마다 합동 천도 불사를 행하고 있다.
중국과 대만의 우란분재
원래 우란분재는 안거 수행을 마친 청정한 승려들에게 갖가지 공양을 올려 선근 공덕을 쌓는 일로,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중국과 우리나라 등에서 조상 숭배 의례로 정착되면서 그 모습이 적지 않게 변질되었다. 오늘날에는 음력 7월 15일에 합동으로 부처에게 공양을 올리고 영가에게 시식을 베풀며 조상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는 추후 천도 의식으로 일반화되었다. 그에 비해 대만 등지에서 행해지는 국제공불재승대회(國際供佛齋僧大會)는 우란분재의 원형을 잘 보존 및 계승하고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우란분재가 고유의 민속 행사와 습합해 오봉(お盆)이라는 명절로 정착되었는데, 오봉은 설날과 더불어 일본에서 가장 큰 명절로 꼽힌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용재총화(慵齋叢話)』
- 『불설우란분경(佛說盂蘭盆經)』,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 16.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