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천사(興天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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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의 능침사로, 세종대에 선종도회소로 지정된 절.

개설

흥천사(興天寺)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었으나, 현재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에 위치해 있다. 태조가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능인 정릉(貞陵)을 조성하고 그 원찰로 세운 절이다. 태조의 후원을 받았으며, 사리전(舍利殿)을 세워 부처의 사리와 대장경을 봉안하였다. 사리전은 세종대 대대적인 중창 공사가 이루어졌으며, 세종대 승록사 폐지와 함께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로 지정되어 선종에 대한 일을 관할하였다. 연산군대에 절이 불탔고, 중종대에 사리전마저 화재로 소실되면서 폐사되었다. 이후 조선후기에 정릉이 다시 왕비릉으로 복구된 이후 현재의 위치에 절을 다시 옮겨 지었다.

변천과 특징

(1) 태조대

흥천사는 태조가 새 도읍인 한양 도성 안에 세운 왕실 사찰이었다. 1396년(태조 5) 8월 13일 현비강씨(顯妃康氏)가 세상을 떠나자 1397년(태조 6) 정월 도성안 취현방(聚賢坊, 현 서울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 부근)에 능을 만들고 정릉이라 하였다. 그리고 정릉 동쪽에 명복을 빌어주는 원당(願堂)을 짓고 흥천사라 하였다. 1396년(태조 5) 12월 태조가 흥천사에 행차하여 공장(工匠)들에게 음식을 하사한 것으로 보아(『태조실록』 5년 12월 1일), 흥천사 공사는 정릉 조성과 동시에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권근(權近)이 찬술한 「정릉원당조계종본사흥천사조성기(貞陵願堂曹溪宗本寺興天寺造成記)」에 의하면 신덕왕후의 소상(小祥)에 맞춰 낙성되었다고 하므로 공사는 1397년(태조 6) 가을쯤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해 10월 태조는 흥천사에서 소재법석을 베풀었고(『태조실록』 6년 10월 16일), 직접 몸소 행차하기도 하였다(『태조실록』 6년 11월 15일). 1398년(태조 7) 8월에는 신덕왕후의 대상재(大祥齋)도 흥천사에서 열었다(『태조실록』 7년 8월 13일).

태조는 흥천사를 개창한 뒤 다시 흥천사 안에 3층 규모의 사리전을 짓기 시작하였다(『태조실록』 7년 5월 1일).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여러 차례 행차하였을 정도로 태조는 사리전 건립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1차 왕자의 난 이후 수도를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에도 흥천사 사리전 공사에 대한 태조의 관심과 지원은 여전하였다. 1399년(정종 1) 10월 흥천사 사리전이 낙성되자 태조는 한양에 행차하여 수륙재를 베풀었고(『정종실록』 1년 10월 19일), 사리전 안에 있는 석탑에 석가의 치사리(齒舍利) 4개, 두골(頭骨), 패엽경(貝葉經), 가사 등을 봉안하였다(『세종실록』 1년 8월 23일). 또한 태조는 사리전을 완성한 뒤 대장불사(大藏佛事)를 흥천사에서 베풀었는데(『태종실록』 1년 윤3월 1일), 1435년(세종 17) 사리각을 수리할 때 탑전 안에 있던 대장경을 별전(別殿)을 지어 옮기자는 의논이 있었던 것으로(『세종실록』 17년 5월 21일) 미루어 대장불사는 사리전에 대장경을 봉안하는 행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태조가 조성한 사리전의 규모나 형태는 정확히 알 수는 없고, 세종대의 기록으로 짐작할 뿐인데, 명나라 사신 황엄(黃儼)이 흥천사를 방문하여 사리각 안의 석탑에 올라가 사리를 직접 봤다고 하는 기록과(『세종실록』 1년 9월 1일), 팔면의 평면을 가진 전각이었다고 하여(『세종실록』 17년 5월 20일), 태조대의 사리전은 팔면의 3층 전각으로 내부에는 사리를 봉안한 석탑이 있고, 전각 안에는 대장경으로 장엄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태조는 흥천사에 환조(桓祖)의 진전(眞殿)인 계성전(啓聖殿)도 조성하여(『정종실록』 2년 6월 1일), 직접 행차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태종실록』 6년 5월 2일).

이처럼 흥천사는 정릉의 원당으로 창건되었으나 단순한 능사(陵寺) 이상의 역할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도성 안에 새로 지은 사찰이라는 점과 선종의 본사(本寺)로 삼도록 했다는 것, 그리고 태조의 부친인 환조이자춘(李子春)의 진전을 절 안에 마련하였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특히 한양은 새 왕조의 도읍으로 유교 정치 이념에 따라 조성된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곳에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에서 멀지 않은 곳에 왕실원당을 조성한 것이다. 그리고 1398년(태조 7) 5월 흥천사 감주(監主) 즉 주지로 임명된 상총(尙聰)이 올린 상서에 의하면 태조는 흥천사를 세우고 흥천사가 선종의 본사 역할을 하도록 지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태조실록』 7년 5월 13일).

조성 당시 흥천사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권근이 찬술한 조성기에 170여 칸에 이르고 금으로 단청을 입혀 화려하고 웅장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경비로 쓰도록 1,000여 결의 전지를 사여했다고 한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흥천사는 단순히 능침사찰로서만 조성된 것이 아닌 새 왕조의 불교계를 이끌어갈 중심 사찰로서, 그리고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불교 조영물로써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같은 흥천사의 조성은 유교를 표방하는 국가 이념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조처였으므로, 태조 사후 흥천사를 둘러싸고 왕실과 유신들의 갈등을 초래하였다.

(2) 태종~세종대

흥천사는 불교 교단의 정리와 그에 따른 사찰 정비 및 사원 경제의 환수가 이루어지던 태종과 세종대에도 왕실원찰이자 선종의 수사찰(首寺刹)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1424년(세종 6) 4월 불교 교단을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하고, 선종과 교종에 각각 18개 사찰만을 공인할 때 흥천사는 선종에 속했을 뿐만 아니라 승록사(僧錄司)가 혁파된 뒤 선종도회소로 지정되어 선종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였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1433년(세종 15)에는 태조와 신의왕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문소전(文昭殿)의 부속 불당을 없애면서 그곳에 있던 불상과 기타 물건들을 흥천사로 이전하였다(『세종실록』 15년 1월 30일).

또한 흥천사에서는 역대 왕과 왕비를 위해 명복을 비는 기신재뿐 아니라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태종실록』 11년 7월 11일)나 왕실의 병의 치유를 기도하는 구병 의례(『세종실록』 4년 8월 5일), 왕의 탄신을 축복하는 탄신재(『세종실록』 6년 4월 9일) 등 국가와 왕실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많은 불사도 설행되었는데, 특히 세종대 이후 흥천사는 대표적인 기우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흥천사 사리전 수리 등을 둘러싸고 왕실과 관료들의 갈등이 크게 표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흥천사와 사리각은 명에서 온 사신들이 즐겨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여(『세종실록』 5년 4월 18일), 외교 활동의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한편, 흥천사 사리전은 태종대 이미 퇴락한 것으로 보인다. 1411년(태종 11) 3월 태종은 흥천사 사리전이 퇴락했다는 말을 듣고 중수를 명령한다(『태종실록』 11년 3월 30일). 그리고 1429년(세종 11) 흥천사 사리전이 기울고 파손이 심해져 예조에서 수리할 것을 청하면서 세종은 사리전 수리를 추진하였다(『세종실록』 11년 2월 3일). 그러나 사리전 수리는 원활치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6년 뒤인 1435년(세종 17)부터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기 때문이다(『세종실록』 17년 5월 12일). 비용 마련과 역부 마련을 둘러싼 논의를 통해 탑전을 헐고 새로 전각을 세우되 재목과 기와의 공급은 관가에서 담당하고, 도첩(度牒)을 주어 승려들을 동원하여 공사를 하고, 따로 제조(提調)를 정해 공사를 감독케 하며, 사리전 안에 있던 대장경은 별전(別殿)을 지어 봉안하되, 별전에 대해서는 선공감(繕工監)이 담당토록 하자는 예조의 건의가 받아들여졌다(『세종실록』 17년 5월 21일). 그러나 이날 이후부터 사리전 중창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았고, 공사로 인하여 궁궐로 옮겼던 사리를 다시 흥천사로 돌려보내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0년 7월 11일). 국가에서 경비를 지원하여 이루어진 흥천사 사리각 중창은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1440년(세종 20) 낙성을 보게 되었다(『세종실록』 22년 4월 23일). 당시 농사철에 가뭄이 들어 모든 공사를 중단했지만 흥천사 사리각만큼은 화공이 석가상을 그리는 것과 건물에 단청하는 것을 계속 진행하였다(『세종실록』 22년 4월 25일). 1442년(세종 24)에는 사리전 중수를 기념하는 경찬회 설행을 둘러싼 관료들의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3월 직제학이선제(李先齊)에게 경찬소문(慶讚疏文)을 짓게 하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성달생(成達生)을 행향사(行香使)로 하여(『세종실록』 24년 3월 17일) 5일간 경찬회를 개설하였다(『세종실록』 24년 3월 24일).

흥천사 사리전은 세종대의 중수를 통해 태조대 초창 당시와는 다소 달라지고 규모는 더 커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은 중수 후 태조와 관련된 각종 보물을 사리전에 봉안하였고(『세조실록』 29년 5월 3일), 동으로 만든 그물을 설치하고(『세종실록』 21년 1월 24일), 5층으로 조성했으며 담장은 이중으로 설치하는 한편 절 주변으로 근장군사(近仗軍師)를 두어 절을 지키고 외인의 출입을 금지하였다(『세종실록』 20년 3월 16일).

(3) 문종대 이후

문종과 단종대에도 세종대와 마찬가지로 흥천사에서는 기우재(『단종실록』 2년 7월 27일), 보공재(報供齋)(『문종실록』 1년 5월 26일) 등을 설행하였으며, 세종 후반 국왕과 신하 사이에 수년간에 걸친 격렬한 논쟁을 야기했던 흥천사는 문종과 단종대에도 탄핵 대상이 되었다. 세조·예종·성종대에도 흥천사는 대표적인 기우도량으로 기능하였다. 1461년(세조 7)에는 사리분신을 기념하여 세조와 세조비인 자성왕비(慈聖王妃)가 함께 발원하여 동으로 종을 주조하였는데, 이 종은 현재 덕수궁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흥천사는 성종대에 부분적인 중수가 있었다. 1480년(성종 11) 5월 흥덕사(興德寺) 중수에 이어 흥천사 중수가 진행되었고(『성종실록』 11년 5월 29일), 1491년(성종 22)에는 흥천사에 죽석(竹席)을 설치하고 문을 중수하였다(『성종실록』 22년 6월 16일). 한편 흥천사는 명나라 사신뿐만 아니라 일본 사신들도 들리고자 했던 사찰로(『성종실록』 25년 5월 7일), 많은 유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종대 흥천사 중수가 진행되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연산군대에도 유신들은 왕실에서의 흥천사 불사에 대한 비판을 계속하였다(『연산군일기』 1년 5월 28일). 한편, 연산군대에 접어들면 흥천사의 위상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1502년(연산군 8) 예조에서 흥천사 사리탑의 문을 열고 닫던 것을 내수사에서 하도록 하였다(『연산군일기』 8년 7월 24일). 흥천사의 존립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 것은 1504년(연산군 10) 일어난 화재였다(『연산군일기』 10년 12월 9일). 1년 전 흥덕사가 화재로 소실된 데 이어 흥천사마저 소실되면서 도성 내에 있던 선·교 양종의 도회소는 모두 혁파되었다. 그리고 연산군은 흥천사를 마구간으로 삼도록 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5월 29일). 그런데 1510년(중종 5) 3월 연산군대 흥천사 화재에서도 건재했던 사리전에 불이 나면서(『중종실록』 5년 3월 28일) 흥천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중종은 사리각 화재를 유생들의 소행으로 의심했으나, 결국 1512년(중종 7) 폐사된 흥천사 땅을 집이 없는 사대부에게 나누어주자는 대간(臺諫)의 건의를 받아들였고(『중종실록』 7년 6월 15일), 이후에도 몇 차례 흥천사 터를 나누어 주어 집을 짓게 하였다.

1569년(선조 2) 왕명으로 정릉의 함취정(含翠亭)이 있던 터에 절을 옮겨지었고, 1794년(정조 18) 성민(聖敏) 등이 발원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의 말사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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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경미, 「조선전기 왕실발원종의 연구」, 『동양학』42, 2007.
  • 최재복, 「조선초기 왕실불교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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