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工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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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공으로 기물을 만드는 것을 업으로 하는 장인.

개설

공장(工匠)은 장인(匠人)·장공인(匠工人)·성녕바치·장인바치·쟁이 등 다양하게 불린다. 『재물보(才物譜)』에 의하면 공(工)은 마음을 공교하게 하고 손을 수고롭게 하여 기물을 만드는 사람이며, 장(匠)은 백공(百工)을 통칭하는 말이다.

조선시대의 공장은 크게 관청에 소속된 관장(官匠)과 개인적으로 작업하는 사장(私匠)으로 나뉘고, 관장은 다시 서울의 관아에 소속된 경공장(京工匠)과 지방의 군현에 소속된 외공장(外工匠)으로 구별된다. 서울과 지방의 공장들은 각각의 명단을 장적(匠籍)에 등록시켜 본조·본사·본도·본읍에 간직하여 철저하게 관리하였다.

장인들의 명부를 토대로 성종 때 제정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서울의 장인은 공조 이하 29개 관사에 총130 종류의 2,795명의 장인이 나뉘어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주로 병장기의 제작과 왕실이나 양반 관료의 생활용품이나 장식품의 제조에 종사하였다.

지방의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외공장은 27종으로 그 총수는 대략 3,450명이었다. 이들은 야장(冶匠)과 같이 전업적인 수공업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농업을 경영하는 자들이며, 다만 장적에 등록이 되어있어 일정한 기한을 관역(官役)에 종사하고 있었다.

장인들의 신분은 원칙적으로 양인(良人)이나 공천(公賤), 사천(私賤)도 장인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점차 양인 중심으로 바뀌어 전적인 노예 노동적 성격에서 탈피하고 있었다. 그 출신의 양천을 막론하고 가장 우수한 공장들은 잡직 체아가 됨으로써 관장화하며 관료 체제 속에 속박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관장제는 재정의 궁핍과 관료들의 횡포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연산군과 중종대를 전후하여 붕괴하기 시작하여 관장 대신 사장들이 공역에 동원되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장인들의 명단이 복구되지 않아 17세기 초까지 국가의 부역을 위해 서울이나 지방에 거주하는 장인들을 징발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그러다가 17세기 말 숙종 연간부터 관청이 복설되고 제도가 정비되면서 공조·상의원(尙衣院)·내수사(內需司) 등 관아에 소속된 관장이나 훈련도감(訓鍊都監)·어영청(御營廳)·총융청(摠戎廳) 등 5군영의 군문(軍門)에 소속된 장인들이 국역(國役)을 지기 시작하였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관아에 장인을 두는 관장제가 해체되면서 사적인 생산에 종사하는 장인들을 차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세기에는 교서관·상의원 등 일부 관청에 소속된 장인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사장이 되었다.

신분

공장의 신분은 원칙적으로 양인이나 관노비(官奴婢), 사노비(私奴婢), 사원노비(寺院奴婢), 승려(僧侶)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점차 양인 중심으로 바뀌어갔다. 1415년(태종 15)에 8만여 명이나 되는 사노비(寺奴婢) 중 일부가 공장화되었다(『태종실록』 15년 8월 29일). 1425년(세종 7)에는 각도에 산재한 1,000명의 사원노비를 선공감 예하의 봉족직(奉足職)을 주어 기술을 습득하게 하였다(『세종실록』 7년 1월 19일). 왕실용 세공품을 제작하는 데 기술이 뛰어난 숙련공들은 공장직에 편입시켰다(『세종실록』 7년 4월 28일). 이처럼 조선전기에는 사노비는 공장의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연산군대에 이르면 모든 공장은 공사천(公私賤)을 막론하고 거주지를 기록하여 관부의 역사에 응할 수 있도록 공장 등록을 강조하였다

수세

상번 의무를 마친 공장은 자유로이 개인적인 영업 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개인 영업에 대해서는 국가에 장세(匠稅)를 따로 물어야 했다. 장인에 대한 수세는 상인에 대한 과세와 함께 1410년(태종 10)에 저화(楮貨) 보급 정책과 관련하여 시작되었다(『태종실록』 10년 11월 2일). 1415년(태종 15) 4월에 이들 장인을 상·중·하 3등으로 등급을 매겨 매월 3장·2장·1장씩 차등 수세하였다(『세종실록』 15년 4월 2일). 공장세(工匠稅)는 1425년(세종 7) 동전제가 시행됨에 따라 전문(錢文)으로 바뀌어 상등은 매월 120문, 중등은 80문, 하문은 40문으로 책정되었다. 이후 1427년(세종 9) 9월에 90문, 80문, 30문으로 각각 인하되었다. 1445년(세종 27)에 저화가 다시 발행된 뒤, 1469년(예종 1)에 일정한 세액이 책정되었다.

담당 직무

공장은 경공장과 외공장으로 나누어 국가에 필요한 신역을 졌다.

첫째, 경공장은 공조 산하의 산하 29개 관서에 모두 129 직종의 공장 2,795명이 소속되어 국역을 졌다. 공조에 신원이 등록된 공장들은 1년의 일정 기간 관청에 나와서 일하는 의무가 부과되었다. 이들이 관청에 나와 일하는 것은 백성이 나라에 대해 지는 국역의 일종으로, 그것은 강제성을 띤 부역 노동이었다.

둘째, 외공장은 각도·각군·각현·각읍 등 지방 8도의 각 관찰사 및 군·현·읍에 모두 3,450명이 속하였다.

변천

고려시대 공장은 중앙과 지방 및 사원으로 구분하여 제도화되었다. 첫째, 중앙 관서에 소속된 공장은 세습제로서 갖가지 기술적 명칭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둘째, 지방의 장인은 일반 농민과 구분하여 소(所)에 거주하는 소민(所民)이다. 이들은 지역에서 산출되는 원료로 특산품을 생산하여 공물로 납부하였다. 셋째, 사원 수공업은 사원 자체의 필수품을 보충하고자 사원 내에 장기가 있는 승려와 사원노비 등에 의해 수공품을 생산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확립된 공장제도를 이어받아 경공장과 외공장 제도로 운영하였다. 첫째, 경공장은 한성부의 장적에 등록되어 있고, 관청에 소속되어 있어 관공장 혹은 관장이라고도 부른다. 성종대에는 무기 제조나 영건 업무는 축소되고 대신 상의원 등 왕실의 공예품을 제작하는 일이 증가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경국대전』에 적힌 경공장의 종류나 숫자는 시대에 따라 변화된 양상을 확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관장제는 연산군·중종대를 거쳐 사치 풍조가 만연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재정 결핍으로 관장에 대한 대우를 충분히 할 수 없게 되어 붕괴되었다. 하지만 숙종대에 중국과 일본 간의 중개무역의 활성화로 재정이 안정되자 공조·상의원·내수사 등 관청이나 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 등 군문에 장인을 소속시키는 관장제가 복구되어 18세기 중반 영조대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정조대에는 광산의 개발이나 중국과의 홍삼 무역 등으로 경제가 활기를 띠면서 관청마다 장인을 두지 않게 되었다. 이때부터 사적인 생산에 종사하는 장인들을 모집하여 사적인 상품이 현저하게 증가하자 장인과 상인 간에 제품의 판매에 대한 이권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9세기에는 국가의 모든 공역에는 사적인 생산에 종사하는 사장들이 동원되었다. 관수품의 조달도 공물(貢物) 형태로 만들어 공물주(貢物主)로부터 매입토록 하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장인들은 요역(徭役) 노동자에서 점차 독립적인 수공업자로 전환되어 갔다. 하지만 국가의 기록이나 왕실의 족보를 만드는 교서관이나 왕의 어복을 비롯한 장식품을 제작하는 상의원 등에는 여전히 일부 장인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강만길, 『조선시대 상공업사 연구』, 한길사, 1984.
  • 김동욱, 『한국건축공장사연구』, 기문당, 1993.
  • 송찬식, 『이조 후기 수공업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3.
  • 유교성, 『한국 상공업사』, 한국문화사대계 2권,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65.
  • 윤국일 옮김, 『新編 經國大典』, 신서원, 1998.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역주) 경국대전. 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 강만길, 「조선전기 공장고」, 『사학연구』 12, 1961.
  • 김신웅, 「조선시대의 경공장과 외공장의 관계」, 『산업경제연구』 12권 1호, 1989.
  • 김신웅, 「호서지방의 외공장과 향시의 관계」, 『산업경제연구』 12권 1호,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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