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역(徭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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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부와 지방관부에서 개별 민가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사역하는 부세제도.

개설

조선전기의 요역은 전세·공납·군역과 더불어 부세제도의 하나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중앙정부와 지방관부는 요역제 운영을 통하여 민가로부터 정기 혹은 부정기적으로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었다. 요역제는 지배기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각종 물자와 노동력을 조달하는 유력한 수단으로써 운영되었다. 세종대 이후로는 요역 징발의 기준을 개별 민가의 토지 면적에 두었다. 17세기 이후에는 대동법의 성립과 잡역세의 확산에 대응하여 요역의 비중이 크게 줄어들었다.

내용 및 특징

요역은 개별 민가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하는 부세제도였다. 전세·공납·군역 등의 부세제도와 달리 요역제 운영에 관한 법제는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지 못한 편이었다. 요역제는 전국적으로 통일된 규정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 다른 부세제도와는 다르게 각 지역의 지리적 조건, 물산(物産) 등 특수한 사정에 따라, 혹은 수령의 자의에 따라 운영되었다. 지배기구는 이와 같은 요역제의 운영을 통해서 부정기·부정량적인 요역의 부담을 개별 민가에 강요할 수 있었다.

요역을 잡역(雜役)·잡요(雜徭)·잡범요역(雜泛徭役)이라고도 불렀다(『태조실록』 2년 4월 19일). 이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잡다한 역민(役民)의 종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종 물자·노동력에 대한 지배기구의 수요가 일정하지 않듯 요역을 통해서 무상의 강제 노동을 징발하는 것은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요역은 그것이 적용되는 역사(役事)의 내용에 따라 크게 4가지로 나뉘었다. 전세미(田稅米) 수송, 공물·진상·잡물의 조달, 토목 공사, 영접 등이었다.

제반 요역 종목 가운데 비교적 정기적으로 부과되던 것은 전세미의 수송, 공물·진상물·잡물의 조달과 관련된 요역이었다. 이는 군현의 민가에 정례적으로 부과되는 상시잡역(常時雜役)이었다. 공물·진상과 관련된 요역은, 대동법 시행 이후 크게 축소되었다. 그러나 전세미 수송의 요역은 갑오개혁으로 전세미의 금납화(金納化)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질 때까지 요역 종목으로 유지되었다.

토목 공사와 영접의 요역은 대체로 부정기적으로 민가에 부과되는 종목이었다. 일이 있을 때마다 차역(差役)하는 것인 만큼, 민가에 돌아오는 부담도 일정하지 않았다. 대동법이 시행된 뒤에도 산릉을 비롯해서 제언 축조, 축성역 등 일부 종목에 한해서 요역 노동을 징발하는 일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조선후기로 갈수록 지방군현별로 시행된 잡역세로 대체되는 일이 많았다. 잡역세는 지방군현을 중심으로 시행되던 부정기적인 요역을 현물세로 전환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15·16세기의 요역제는 기본적으로 군현을 단위로 운영되었다. 수령은 요역을 부과하는 직무를 담당하였다. 성종대에 요역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요역제 운영에 관한 관찰사의 권한과 책무는 강조되었다. 관찰사는 관내 군현에 요역을 분정(分定)하고, 수령에 의한 자의적인 요역제 운영을 통제하는 기능을 부여받았다.

세종대부터 요역 징발의 기준을 토지 면적의 크기에 두는 기본 방침이 확립되었다. 성종대에 마련된 역민식(役民式)과 『경국대전』의 요역 규정은, 전지(田地) 8결마다 1명의 역부를 차출하되, 사역 기간은 연간 6일을 넘지 않게 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였다(『성종실록』 2년 3월 19일). 이로써 개별 민가가 보유한 노동력보다는 전결(田結), 곧 사유지 면적을 요역 징발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지주제가 발전하고 있던 시기에 사유지의 크기는 부의 척도였으며 나아가 세금과 역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는 기준이 될 수 있었다. 이를 통하여 지배기구는 전국의 토지에 대한 강력한 지배를 실현하고, 이에 입각하여 보다(조금 더) 확실한 부세의 원천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지배 체제를 유지·강화하기 위한 물적 기반은 여기에서 모색되었다. 국가는 농민들을 도망할 수 없는 토지를 매개로 한 부세의 담당자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군현에서의 요역제 운영은 현실적으로 신분제적 지배 질서의 규제를 받았다. 지방군현에서 수령이 요역을 징발할 때 현실적으로 양반 지주층은 제외되기 쉬웠다. 그 결과 하층 농민들은 과도한 요역 부담을 안게 되었다. 농민층은 양반 중심의 지주제의 확대 과정에서 점차 토지 소유에서 배제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부역 노동의 부담이 집중되어 점차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층은 역을 피하고 살던 곳을 떠나 떠돌아다니면서 이에 대응하였다. 이로 인하여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는 요역제가 동요하였고, 대동법의 시행과 잡역세의 수취 등 현물화된 역가를 수취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이후 대동법이 시행되고 잡역세제도가 확산되면서 역역(力役)으로서의 요역이 수취제도 전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에도 남아 있던 역역의 종목은 적지 않았다. 예컨대 17세기 초엽의 산릉역(山陵役)에서는 8,000~9,000명의 연군을 징발하여 1개월씩 사역하게 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부터는 산릉역에서 연군을 요역·징발하던 일은 그쳤으며, 대신 승군의 부역 노동과 모군의 고용 노동을 채택하였다. 산릉역에서의 노동력 수급 체계는 이와 같이 요역제에서 모립제(募立制)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

조선후기 중국 칙사를 접대하는 분야도 여전히 많은 요역 노동을 징발하는 분야였다. 칙사의 접대를 위하여 태평관(太平館) 등 건물을 수리하고 도로를 닦으며 교량을 건설하는 등의 일은 수리군(修理軍)이 담당하였다. 칙사를 영접하는 데에는 차비군(差備軍)·수소군(修掃軍)·조역군(助役軍) 등이 필요하였다. 1606년(선조 39)의 경우, 경기·충청·강원 등지에서 징발된 차비군의 수는 모두 1,200여 명에 달하였다.

이처럼 산릉역과 칙사 접대의 요역은 대동법 이후에도 요역을 징발할 수 있는 특수 분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17세기 이후의 요역은, 조선전기처럼 상례적인 것이 될 수 없었다. 또한 지배기구의 입장에서도 농민의 노동력을 크게 수취할 수 없었다. 17세기 이후 요역은, 일반적으로 단기간의 노역에 농민을 동원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요역에 참여한 농민은, 대가로 대동미를 비롯해서 신포 등을 감면받기도 하였다. 이전의 요역제 아래서 징발된 연군들이 부역 기간 동안 먹을 역량(役糧)을 스스로 마련하였던 것과 달리, 17세기 후반의 연군들은 역량을 지급 받는 경우가 많았다. 요역을 징발할 때 노동력을 그대로 징발하기보다는 대전(代錢)·방고전(防雇錢) 등의 이름으로 대가를 주는 일도 흔히 볼 수 있다. 요역의 부역 노동이 물납세로 개편되는 과정이었다.

변천

세종·성종대를 거치면서 요역 징발의 기준을 민가가 소유한 토지 면적의 크기로 하는 기본 방침이 확립되었다. 17세기 이후 대동법이 시행되고 잡역세제도가 확산되면서 역역으로서의 요역은 크게 축소되었다.

참고문헌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 2010.
  • 이정희, 『고려시대 세제의 연구: 요역제도를 중심으로』, 국학자료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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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