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역(雜役)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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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잡역 |
한글표제 | 잡역 |
한자표제 | 雜役 |
상위어 | 역(役) |
관련어 | 요역(徭役), 잡요(雜徭), 잡요역(雜徭役), 연호잡역(烟戶雜役) |
분야 | 경제/재정/역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윤용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잡역(雜役)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20년 9월 21일 |
① 15·16세기의 요역 자체, 또는 중요 종목에 포함되지 않는 잡다한 요역.
② 17세기 이후의 민간에 부과된 요역을 비롯한 잡물 조달의 역.
개설
15·16세기의 잡역은 요역 자체를 뜻하거나, 혹은 중요 요역 종목 이외의 잡다한 요역을 지칭하였다. 17세기 대동법이 시행된 이후에는 일부 요역 종목만이 민간의 부담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러한 노동력 징발의 요역과 관부에서 징수하는 각종 잡물 조달의 역을 잡역이라 지칭하기도 하였다. 17세기 이후의 잡역은 점차 군현 단위에서 현물로 수취하는 잡역세로 개편되었다.
내용 및 특징
잡역은 요역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었다. 요역은 부정기적이며 부정량의 수취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잡다한 종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민간의 노동력이 필요한 모든 분야에서 요역제가 적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역은 전국적으로 통일된 법제에 의하여 획일적으로 규격화할 수 없었던 데서 다른 현물 조세와 구별되었다. 이와 같은 성격을 지닌 요역은 흔히 잡역으로도 불렸다. 또는 요역 종목 중 특별히 관리되지 않았던 종목에 한정해서 잡역으로 지칭하기도 하였다.
1492년(성종 23) 편찬된 『대전속록』에는 복호(復戶)에게 주어지는 면역의 혜택에 포함시킬 수 없는 중요한 요역 종목이 제시되어 있었다(『성종실록』 20년 9월 21일). 즉, 진상물을 서울에 실어다 바치는 일, 저장한 얼음을 캐서 바치는 일, 철물을 제련하는 일, 공물을 서울에 수송하는 일, 왕의 거둥 때 음식을 바치는 일[支供], 성을 쌓는 일[築城] 등 17가지 요역 종목이었다. 이 종목의 요역은 노동력이 많이 드는 대역(大役)으로 중시되었고, 따라서 복호의 감면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외의 잡다한 요역은 잡역으로 분류되었다.
17세기에 대동법이 시행되었지만 일부 요역은 여전히 민간에 부과되었다. 그 하나는 지방관청의 일상적인 관수잡물(官需雜物)을 조달하는 일이었다. 이는 대동법 이후 농민들이 부담하던 물납(物納)의 연호잡역(烟戶雜役) 중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다른 하나는 중앙정부에서 비정기적인 방식으로 긴급하게 노동력을 징발하는 산릉(山陵)의 요역과 중국에서 오는 사신의 접대[詔使]와 관련된 요역 등이었다. 그 밖에 민간의 노동력을 징발하는 일부 요역 종목이 남아 있어서 민가의 부담이 되었다. 이처럼 17세기 대동법이 시행된 이후, 여전히 민간에 부과된 잡물 조달의 역과 노동력 징발의 요역을 통칭해서 잡역이라 지칭하였다.
변천
17세기 이후의 잡역은 점차 군현 단위에서 수취하는 현물세인 잡역세로 개편되었다. 잡역세는 정규 국세(國稅)는 아니지만 지방 재정의 운영에 불가결한 부세로 자리 잡게 되었다.
참고문헌
- 김덕진, 『조선후기 지방재정과 잡역세』, 국학자료원, 1999.
- 김덕진, 『조선후기경제사연구』, 선인, 2002
- 김옥근, 『조선후기 경제사연구』, 서문당, 1977.
- 김용섭, 「조선후기의 민고와 민고전」, 『동방학지』 23·24, 1980.
- 벽사이우성교수정년퇴직기념논총 간행위원회 편,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 上』, 창작과 비평사, 1990.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 2010.
- 송양섭, 「균역법 시행기 잡역가의 상정과 지방재정 운영의 변화-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 제38호, 2010.
- 윤용출, 「15·16세기의 요역제」, 『부대사학』 10, 198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