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관(太平館)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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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태평관 |
한글표제 | 태평관 |
한자표제 | 太平館 |
동의어 | 대평관(大平館) |
관련어 | 객관(客館), 남별궁(南別宮), 모화관(慕華館), 정동행성(征東行省) |
분야 | 정치/외교/접빈 |
유형 | 건축·능·원·묘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송희 |
건립시기/일시 | 1395년(태조 4) |
장소 | 서울 중구 서소문동 58-17 |
관련 인물 | 박자청(朴子靑), 황엄(黃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태평관(太平館)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4년 윤9월 19일, 『태종실록』 9년 4월 13일, 『세종실록』 11년 1월 6일, 『연산군일기』 10년 7월 10일, 『중종실록』 12년 7월 19일, 『선조실록』 35년 1월 21일, 『인조실록』 6년 11월 27일, 『인조실록』 16년 10월 10일 |
조선시대에 한양에 있었던 중국 사신의 숙소.
개설
1393년(태조 2)에 개경에서 정동행성(征東行省)이 태평관(太平館)으로 변경되었고, 1395년에는 한양의 태평관이 건설되었다. 태종·세종대에 크게 고쳐 지었다. 중종·선조대에는 수리하여 왕비를 맞아들이는 가례(嘉禮) 장소로 사용하였다. 임진왜란으로 크게 손실되었고, 이후 남겨진 일부 건물만으로 남별궁(南別宮) 등과 함께 접대 장소로 사용되었다.
중국 사신이 도착하면 먼저 궁궐에 가서 파견된 임무를 수행한 후 숙소인 태평관으로 들어갔다. 태평관에서는 왕을 비롯한 세자·종친·관청·관원들이 연일 문안하고 연회를 베풀어 대접하였고, 건물 주변에서는 시장이 열려 중국에서 가져온 물건을 팔았다. 그 밖에도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나 물자·환관(宦官)의 점검 장소, 왕비나 세자빈을 맞아들이는 왕실의 가례 장소, 유구·야인사절의 숙소, 표류 중국인의 심문장이나 임시 거처, 과거 시험장, 신하들을 위한 연회장, 제사용 희생동물의 사육장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위치
세종대에는 숭례문 안 황화방이었고, 후기에는 양생방이었다. 일제시대에는 경성부 서소문정 58 120번지였고, 현재는 서울 중구 서소문동 58-17번지이다.
변천
1393년 개경에서 정동행성을 수리하여 태평관이라 하였고, 1395년에는 천도한 한양에 신축하여 사신들의 숙소로 삼았다(『태조실록』 4년 윤9월 19일). 1408년(태종 8)에 태평관 인근 사찰을 사신 수행원의 관사로 삼았고, 이듬해 정릉(貞陵)의 정자각을 헐어 북쪽에 3간 누각을 짓고, 헐어 낸 태평관의 자재로 동헌(東軒)·서헌(西軒)을 창건하였는데, 사신 황엄(黃儼)의 구상이었다(『태종실록』 9년 4월 13일). 벽면을 그림으로 장식하고 소나무를 심었다. 1419년(세종 1)에 박자청이 군인을 동원하여 어실(御室)을 짓는 등 크게 개축하였으나, 여전히 좁다는 의견이 있었다. 1429년(세종 11)에 창덕궁과 경복궁 사이에 새로 짓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원래 자리에 높고 크게 개축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세종실록』 11년 1월 6일), 영접도감에서 관장하게 하였다.
1454년(단종 2)에 태평관 동랑과 영접도감에서 불이 났다. 세조대에는 유구국 사신을 유숙시키며 물건을 구매하기도 하였는데, 중국 사신들은 자신들의 무역 행위에 대한 단속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이후 정부에서는 가능하면 너그럽게 용인하였다. 연산군은 성균관을 철거하고 성균관원·유생과 문묘(文廟)의 신위를 태평관에 옮겨 두고(『연산군일기』 10년 7월 10일), 문과 전시(殿試)도 그곳에서 시행하였다. 1517년(중종 12)에는 태평관에서 친영(親迎)의 예를 갖추어 문정왕후를 맞이하였다(『중종실록』 12년 7월 19일).
한편 임진왜란으로 태평관이 파괴되어 환도 후 남별궁이 사신의 숙소가 되었다. 복구 논의가 있었으나 국고의 고갈로 대대적 수축은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예전의 넓은 남쪽 대청 대신 어실과 서청의 좁은 장소를 연향 장소로 사용하였다(『선조실록』 35년 1월 21일). 그러나 같은 해 왕비의 친영은 옛날처럼 태평관에서 거행되었다. 이후 사신에 대한 연회는 주로 궁궐과 태평관에서 거행하고, 사신의 숙소로는 남별궁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사신이 명사와 동등한 대접을 요구하며 태평관이나 남별궁에 거처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인조실록』 6년 11월 27일). 이후 왕실의 친영은 수리가 필요한 태평관 대신 별궁을 사용하게 되었고(『인조실록』 16년 10월 10일), 태평관의 일부 자재를 뜯어 홍제원(弘濟院)을 수리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점점 쇠락해 가다가, 1908년 이후 일대가 일본 총독부 관원들의 관사로 변하게 되었다.
형태
본채를 중심으로 남쪽으로 문이 있고 북으로는 누각이 있으며, 동서로는 행랑이 있었다. 북루(北樓)에서는 한양 성안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왕이 거동할 때 잠시 머물던 어실과, 관반청(館伴廳)이나 영접도감·분예빈시의 창고 등 관청과 부속 건물들이 있었다.
현황
옛 건물은 전혀 없고, 서울시에서 세운 태평관 터 표석만 남아 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궁궐지(宮闕志)』
- 『한경지략(漢京識略)』
- 『통문관지(通文館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志備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별건곤(別乾坤)』
- 서동천·한동수, 「조선시대 太平館과 東平館의 특징」,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논문집』 27-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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