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貞陵)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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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릉 |
한글표제 | 정릉 |
한자표제 | 貞陵 |
대역어 | 능원(陵園) |
관련어 | 광통교(廣通橋), 흥천사(興天寺) |
분야 | 왕실/왕실건축/능·원·묘 |
유형 | 능·원·묘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정춘환 |
장소 | 취현방(聚賢坊) 북녘 언덕(현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지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릉(貞陵)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9년 2월 23일, 『현종실록』 10년 1월 4일, 『태종실록』 6년 5월 2일, 『태종실록』 10년 8월 8일, 『태조실록』 7년 5월 18일 |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강씨(康氏)의 능.
개설
신덕왕후는 고려시대 권문세족이었던 판삼사사(判三司事)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포천의 전장(田莊)에서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지병으로 1396년(태조 5) 8월에 승하하였고, 능지는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해당하는 취현방(聚賢坊) 북쪽 언덕이었다.
이후 1409년(태종 9)에 태종에 의해 도성 밖 사을한(沙乙閑)의 산기슭으로 천장되었는데(『태종실록』 9년 2월 23일), 태종은 그 뒤에도 봉분 및 정자각과 석물을 파괴하고 종묘에 신덕왕후를 부묘하지 않았다. 신덕왕후의 아들 이방석(李芳碩)이 세자로 책봉된 사건에 큰 반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릉은 1669년(현종 10)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복원이 시작되었으나, 병풍석과 난간석 등은 생략되었다(『현종실록』 10년 1월 4일).
조성 경위
신덕왕후는 태조가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는데, 소생으로 무안대군(撫安大君) 이방번(李芳蕃), 의안대군(宜安大君) 이방석, 경순공주(慶順公主)를 두었다. 1397년(태조 6)에 승하하자 취현방 언덕에 예장하였으며, 시호를 신덕왕후, 능호를 정릉이라 하였다.
조성 상황
태조는 정릉을 조성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으나, 태조가 상왕으로 물러나자 태종은 정릉의 영역을 의도적으로 축소시켰다. 능에서 100보 밖에 집을 짓도록 허가하고, 능역에 자라던 소나무까지 베어 쓰도록 하였다(『태종실록』 6년 5월 2일). 1408년(태종 8)에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과 신하들은 정릉의 천장을 계획하였다. 도성 안에는 능을 쓸 수 없다는 점과 사신이 묵는 관사가 가깝다는 이유를 들어 1409년(태종 9) 2월에 오늘날의 위치로 천장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정릉의 정자각과 석물을 관사 북루(北樓)를 짓는 재목으로 썼고, 봉분을 깎아내 사람들이 알 수 없게 하였다. 이어서 8월에는 옛터에 있던 석물을 광통교를 수리하는 데 쓰도록 했다(『태종실록』 10년 8월 8일).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태조가 승하한 뒤, 마치 미리 계획된 것처럼 진행되었다.
그 뒤 1581년(선조 14) 11월에 신덕왕후의 후손 강순일(康純一)이 왕에게 군역의 면제를 청한 것을 계기로 신덕왕후의 존재와 정릉 복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릉은 점차 격이 낮아져, 황폐한 정자각 터에 장막을 설치하고 재를 올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 송시열의 거듭된 건의에 의해 1669년(현종 10) 1월부터 정릉의 정비가 시작되었다. 7월에는 정자각을 새로 지었으며, 석물은 병풍석과 난간석, 무인석을 생략하고 새로 조성하였다. 또한 정비 공사가 마무리되어 가는 중에 신덕왕후의 부묘가 결정되어, 10월에는 신주를 종묘에 모시게 되었다.
변천
1669년(현종 10)에 정릉을 복원할 때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지 않고, 양석과 호석 각 2개, 망주석 1쌍, 혼유석, 장명등 1좌, 문인석 1쌍과 마석 2개만 배설하였다. 이때의 모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자각은 1699년(숙종 25)에 중건된 바 있는데, 최근에는 1987년에 수리하였다.
정자각 오른편에는 1770년(영조 46) 10월에 세운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안에는 1899년(광무 3)에 신덕왕후를 고황후(高皇后)로 추존하고, 이듬해 표석을 고쳐 세운 비가 있다. 비각은 1996년에 보수 및 번와 공사를 하였고, 1998년에는 비각 아래쪽에 소실되었던 수복방을 복원하였다.
2003년부터 시작된 청계천 복원 공사 과정에서 석물이 일부 발견되었다. 1408년(태종 8)에 건립된 건원릉(健元陵)의 병풍석과 우석에 새겨진 것과 문양이 거의 동일하고, 석물을 광통교를 수리하는 데 썼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일치하는 점으로 미루어 정릉의 석물로 추정하고 있다.
관련 사항
흥천사(興天寺)는 태조가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원찰로, 흥천사 북쪽에 사리전 건립도 함께 계획하였다. 태조는 자신이 왕위에 있을 때 사리전을 완성하지 않으면 건립이 중단될 것을 염려하여 정릉과 흥천사에 자주 거둥하면서 공사를 재촉하기도 했다(『태조실록』 7년 5월 18일). 흥천사는 화재로 폐허가 되었다가, 1794년(정조 18)에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에 새로 창건되었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정릉지(貞陵誌)』
- 『정릉표석영건청의궤(貞陵表石營建廳儀軌)』
- 삼성건축사사무소, 『청계천 발굴유적 실측 및 설계보고서 I-광통교 실측조사보고서』, 서울특별시,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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