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宦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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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시대 궁궐에서 사역하는 내관(內官)으로, 거세된 사람.

개설

고려후기와 조선시대에는 내시(內侍)로 통칭되었다. 환관(宦官)에 대한 명칭은 다양하다. 용어상으로 내관·내시 등 ‘내(內)’ 자는 외관(外官)과 상대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중사(中使)라는 말도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다. ‘화(火)’나 ‘환(宦)’, ‘엄(閹)’은 고자라는 의미가 강하다. 또한 ‘내수(內竪)’, ‘폐환(嬖宦)’이라 부르는 경우는 왕의 총애를 받는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경우 내시와 환관이 엄격하게 구분되었으나 조선 성종 이후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의 경우 환관보다는 환자(宦者)라는 용어가, 조선전기에는 내관·환관이라는 용어가, 조선후기는 내시·내관·환관이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었다.

환관은 신라 흥덕왕 때 기록 중 환수(宦竪)라는 용어를 통해 그 존재가 확인된다. 고려에서는 처음에는 왕 가까이에 수위(守衛)와 근시(近侍)를 하던 내시직(內侍直)에 재예와 용모가 뛰어난 세족 자제 또는 시문·경문(經文)에 능한 문신을 임명했다. 그러나 의종 이후 점차 환관을 임명하였다. 고려초부터 인종 때까지는 대간(臺諫)서경(署經) 제도가 원활히 운영되어 환관에게 직첩(職牒)을 수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환관의 득세와 폐해를 막기 위해 액정국(掖庭局)에 속하게 하여 궁중의 잡역을 담당하게 했으며, 남반 7품까지밖에 오르지 못하는 한품직(限品職)에 서용하고 정직(正職)에는 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종 때 환관 정함(鄭歟)과 백선연(白善淵) 등은 왕의 총애를 받았다. 이들이 왕의 총애를 업고 횡포를 부리는 등 왕정이 문란해져 일시적으로 환관 세력이 힘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신의 난으로 왕권이 약화되자 환관 세력도 쇠퇴하였다. 그 뒤 원 간섭기에 국가 기구의 허구화로 대간 기능이 마비되고 외세 의존적인 왕권의 전제가 대두되자, 환관이 다시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원종 때는 환관이 6품 이상의 조관(朝官)에 서용되어 한품직의 법제적인 장벽이 제거되었다.

1300년(고려 충렬왕 26) 왕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가 환관 수명을 친정인 원나라 세조(世祖)에게 바친 이후로는 환관을 바치라는 요구가 빈번하였다. 결과적으로 원나라 조정을 배경으로 한 환관들의 득세로 환관이 군(君)에 봉해지거나 관직을 제수받는 것이 남발되었다. 환관은 왕의 권력을 이용해 자기의 출신 지역을 속현·부곡에서 일반 군·현으로 승격시키기도 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본국인 고려를 중상모략하고 악질적인 불법 행위를 자행하는 자도 있었다. 충선왕 때의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방신우(方臣祐)·이대순(李大順), 충혜왕 때의 고용보(高龍普) 등은 특히 심하였다. 특히 백안독고사는 원한을 품고 있던 충선왕을 원나라 영종(英宗)에게 참소하여, 티베트[吐蕃]로 귀양을 보내게까지 하였다.

이러한 특수 귀족화한 환관 세력의 권위 신장 결과로 1356년(고려 공민왕 5)에 환관의 관청인 내시부(內侍府)가 설치되었다. 이에 환관직도 내첨사(內詹事)·내상시(內常侍)·내시감(內侍監)·내승직(內承直)·내급사(內給事)·궁방승(宮本丞)·해관령(奚官令) 등 7종으로 분화되었다. 내시부 제도가 법제화되어 정2품에서 종9품 통사(通事)에 이르기까지 관직을 제수 받은 121명의 환관이 내시부에 속하게 되었다.

환관은 궁중에 배치되었고, 대간의 권한을 대신해 왕의 측근에서 정치에 개입하였다. 대토지를 점유하는 등 정치·경제 질서를 문란하게 하기도 하였다. 공양왕 때에는 왕의 언약도 환관의 세력 앞에 실행되지 않을 정도였으며, 관직을 받은 환관은 더욱 증대되고 품계는 급격히 상승되었다.

이러한 고려말 환관 세력의 정치적·경제적 부작용은 권문세가의 그것과 더불어 고려 사회의 붕괴를 촉진시키는 구실을 했다. 그리고 조선을 건국하며 재정비되기에 이르렀다. 본래 ‘환관’은 고려시대에는 숙위 혹은 근시 관원이었으나, 고려말 환관들이 내시직에 많이 진출하면서 환관을 의미하는 용어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환관은 거세로 인해 남성적인 특징이 퇴화해 중성화하고, 여성적인 동작이 뚜렷해졌다. 음성이 변하고 수염이 빠지며, 성격도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육체적 결함을 의식해서인지 항상 열등감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정직하고 자비심이 많다고 하지만 반대로 물욕(物慾)이 강해 재물 모으는 일에 열중하기도 하였다. 왕을 측근에서 받들면서 여러 기밀을 접하는 기회가 많아 스스로 권력을 장악해서 정치를 혼란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

내용 및 특징

환관의 출신 신분을 보면, 고려시대 환관들의 신분은 대부분 천예 출신이었다. 일부가 관직에 진출하기는 하지만 남반 7품 이상을 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 역시 천민 출신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잡역이나 일반 양인이 환관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간혹 양반의 자제로 환관이 되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시대 궁중 내 환관의 수는 140명이며, 1년에 4도목으로 나뉘어 근무 평가를 받았다. 내시부 환관들의 승진은 4품 이하는 문·무관 근무 기한의 예에 의하며, 3품 이상은 왕의 특명에 따라 승진한다고 하였다. 근무일의 계산은 궁궐에 사는 장번자(長番者)와 통근 근무자는 매일 1일을 계산하고, 당직을 선 사람도 1일을 계산하였다. 책을 강독하여 그 정도에 따라 근무 일수를 계산하기도 하였다.

『성호사설』에 의하면 “지금 환관이 335명이고, 궁녀가 684명이다.” 하였다. 효종 때에도 “지금 이 내시부의 장부에는 장번(長番) 36명, 출입번이 168명, 전함(前銜) 41명, 소환(少宦) 55명, 재상(在喪) 33명으로서, 합하여 333명입니다.” 하였다. 즉, 일반적으로 환관의 인원은 300~400명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환관의 형성 형태를 보면, 특수 사정에 의해 강제적으로 거세된 경우와 우연한 사고로 인해 된 경우, 선천적인 경우, 그리고 스스로 또는 부모, 기타 보호자에 의해 거세된 경우를 들 수 있다. 중국에서는 불의자(不義者)에게 5형(刑)의 하나인 궁형(宮刑)을 행해 궁중 환관으로 충당하였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형벌 제도상 궁형이 시행되지 않은 대신 훈제(燻制) 방법으로 불의자를 거세하였다. 즉, 원나라와의 외교 관계에서 환관을 바치기 위해 봉건적인 가혹한 법규 외적인 강제책으로 거세를 실행했으리라 추측된다.

한편 스스로 거세하는 경우는 빈곤한 경제 사정이나 지방 관료의 가혹한 수렴 및 부역을 피하고 환관으로의 향락과 득세를 위해, 또는 가내 노비가 주인의 혹독한 탄압을 벗어나려는 목적으로, 또 군역을 피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충렬왕 이후에는 원나라 세력에 붙은 환관의 위세와 원나라 황제의 은총으로 고려 왕이 은혜를 베풀자 환관에 대한 동경심이 일어났다.

환관을 양성하는 방법으로 선천적인 경우보다는 스스로 거세한 자궁자의 경우가 주목된다. 고려시대 원 간섭기에는 출세하기 위하여 자궁자가 속출하였다. 반면 조선시대의 경우 자료상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자궁자의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조선초기 역시 명나라에 어린 화자(火者)를 보내는 관습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인원을 충당하기 위하여 어린 화자를 꾸준히 양성하였을 것이다.

조선초기까지는 관료들이 개인적으로 환자를 집에서 부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환자의 수가 줄었기 때문에 개인이 환자를 부리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였다.

보통 환관들은 1~5명 정도의 양자를 받아들여 가계를 계승하였다. 특이한 점은 고려말이나 조선초기까지는 관료의 자식을 양자로 받아들이는 양상이 나타난 반면, 조선후기에는 사족의 자식 중에서 환관에게 양자로 가는 경우가 드물었다. 또한 관료나 사족의 자식이 양자로 갔더라도 여말선초에는 그 친부모와 양자로 간 자녀가 서로 교류를 하였으나 조선후기에는 단절하였다.

조선시대 수양자법(收養子法)에는 본래 동성(同姓)에 한해 양자를 삼도록 되었다. 그러나 환관의 가계(家系)가 단절될 수 있음을 배려해, 다른 성씨의 양자도 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환관도 처첩을 거느리기도 했으며, 환관의 아내를 환처(宦妻) 또는 동정녀(童貞女)라고 하였다. 양자에 의해 이어진 내시 종파(宗派)는 계림파(桂林派)·판곡파(板谷派)·강동파(江東派)·장동파(壯洞派)·과천파(果川派)·서산파(西山派) 등이 있었다.

환관들의 대우는 관직상 일반 조관들과 큰 차이가 보이지 않지만, 국가가 제공하는 개인 호위병인 반당(伴倘) 등 예외적인 면에서는 차이를 보였다. 또한 큰 형벌이 아니면 자체적으로 처리하였다. 이들은 관직 품계상 종2품까지 올라갈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1품까지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과 조관의 관직 체계는 전혀 별개로 규정되었다.

조선시대 환관은 내시부에 속하였다. 내시부의 임무는 『경국대전』 「이전」 ‘내시부’조에, “궐내의 음식 감독, 왕명 출납, 문 지키기, 소제의 임무를 맡는다.” 하였다. 고려전기까지는 궐내에서 잔심부름이나 청소의 임무를 맡다가 원 간섭기부터 왕명 출납이나 왕실의 재정 관리를 맡았고 각사에 나뉘어 파견되기도 하였다. 고려말 내시부가 창설되고, 조선초기 왕실 내의 임무로 정례화되면서 내시부는 체계를 갖추었다. 그 외 왕의 명령에 의하여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 나가기도 했고, 중국에 바칠 공녀를 선발하기도 했으며, 원자를 자신의 집에서 키우거나 그 주위에서 보양하기도 하였다. 또한 매[海靑]를 관리하고, 제사나 기신제·의례 등을 주관하거나 시릉관(侍陵官)의 일을 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그중에서 궐내 수라상의 음식을 검사하고, 내수사(內需司)를 감독하는 것으로 대표되는 궁중 내의 임무는 환관들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였다. 궁중 내의 물품들을 출납한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환관은 왕명 출납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왕명 출납은 권력의 향방을 가져다주는 문제로, 출납의 관장 정도에 따라 환관들의 위상 변화를 알 수 있다.

환관의 성적 평가는 특별 근무 일수로 환산되어 정상적인 근무 일수와 함께 고과(考課)의 기준이 되었으며, 1년에 네 번 근무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교육과 성적 평가는 한편으로 이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환관은 왕·왕비 등의 측근에 있다는 이유로 경제적 이권을 챙겼으며 정치 세력과도 연결되어 궁중의 질서를 어지럽히기도 하였다.

환관은 궁 안에 거주하는 장번 환관과 궁궐 가까이 종로구 봉익동과 효자동에 집단 거주하면서 경복궁·창덕궁·종묘에 출퇴근하는 출입번(出入番) 환관이 있었다. 특히 왕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장번 환관은 대전(大殿)의 장번 내시로 대감 호칭을 받을 만큼 부귀영화를 누리기도 하였다.

한편 환관은 모시던 왕이 세상을 떠나면 궁궐 밖에 나와 살았으며, 죽을 때까지 소복(素服)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죽어서도 집단적으로 묻혔는데, 지금의 도봉구 쌍문동, 파주시 교하면, 양주군 장흥면 등에 묘지군이 있다. 이 환관 제도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내시사로 변하였다가, 1908년 완전 폐지되었다.

변천

조선전기 환관제의 정비와 환관 활동을 살펴보면, 태조대는 아직 제도가 정비되지 않아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였다. 그 결과 환관 김사행은 궁중 내의 제도 정비, 각종 역사 감독, 불사(佛事) 등을 통하여 왕의 총애를 받아 도평의사사에 참여하였다. 태종대에는 환관들을 조관 관직에 임명하는 것을 금지하는 한편 복색을 개정하려 하였지만 건국 초라는 사정 때문에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세종대는 왕명 출납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단종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일부의 환관들이 수양대군을 지지하면서 왕위 찬탈을 도왔다. 성종대에는 환관과 조관을 확연히 구분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외척이나 관료들 중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환관이 필요하였다. 이들은 환관을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특히 연산군대는 왕과 신하들이 대립하면서 왕의 측근에 있는 모든 정치 제도가 변하는 시기였다. 연산군의 폭정이 심해지는 과정이나, 명종대 외척 정치 상황에서는 환관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때문에 승전색을 왕과 동일시하거나, 내수사의 역할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중종대 사림은 환관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지고 있어 환관을 억제하려 했다.

조선후기에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로 호위하며 모시는 데 환관이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성종 이후 조관과의 구별 의식은 더욱 확연해지고, 환관과는 서로 교류하지 않는 것을 예의로 생각하였다. 특히 재상은 환관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흔히 행하였던 내시부의 공문 발송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또 소송 사건에서의 차별, 환관들의 결혼 반대, 복색 구별을 통해 엄격히 신분적으로 구분하고자 하였다. 조선후기 환관 억제 논의 이후 환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기본적 인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왕의 측근에서 생활하다 보니 각종 역모 사건에 참여하는 경우도 많이 있고, 또한 지방 왕래 시에 특권 혹은 횡포를 누리기도 하였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환관은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환관 제도는 고려말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점차 정착하였다. 정치적인 개입을 방지하고, 궐내의 임무로 국한되면서 정비되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인원은 늘어나고 제도 역시 안정되었다. 다른 성씨를 가진 양자를 통해 가계를 계승해나가겠다는 의식에도 충실하였다. 환관이 양자를 통해 가계를 잇는 것은 환관이 왕의 측근으로서 왕조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박영규, 『환관과 궁녀』, 김영사, 2004.
  • 장희흥,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경인문화사, 2006.
  • 三田村泰助, 『宦官: 側近政治の構造』, 中央公論社, 1992.
  • 김동수, 「조선초기의 검교직」, 『진단학보』 51, 1981.
  • 박한남, 「고려내시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3.
  • 이우철, 「고려시대의 환관에 대하여」, 『사학연구』 1,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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