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영(親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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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예식을 올리고 신부를 맞아 오는 의식.

개설

친영(親迎)은 신부가 신랑 집에 와서 혼례를 올리는 중국의 혼인 풍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친영이 이전에 있었던 중국 혼례와 다른 점은 신랑이 신부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나아가 맞이하여 오는 것으로, 주자가 『가례』의 이 친영 방식을 통해 음(陰)에 대한 양(陽)의 적극성을 강조한 것이다. 반면 우리의 오랜 관행은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혼례를 갖고 일정 기간을 그곳에 머무는 남귀여제(男歸女第)의 방식이었다.

1435년(세종 17) 3월 4일에 파원군(坡原君)윤평(尹泙)숙신옹주(淑愼翁主)를 친히 맞아 가니 본국에서의 친영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坡原君尹泙 親迎淑愼翁主 本國親迎自此始]고 하였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행해진 첫 친영 사례인 것이다(『세종실록』 17년 3월 4일). 그러나 이것이 원래 신부 집에서 혼례를 올리던 오랜 고유의 관습을 바꿀 수는 없었다. 현실이 그렇다고 하여 당시 사족들의 입장에서는 처가에 오래 머물면서 본가를 소홀히 함으로써 성리학적 이념에 어긋나는 제도를 그대로 묵인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신랑이 혼례 후에 신부 집에 머무는 기간을 3일로 최소화하는 반친영(半親迎)이란 절충안이었다.

왕실에서는 조선초기 이후에 친영 방식을 지켜왔고, 이를 위해 친영 때 신랑이 머물 처소를 별궁 등에 미리 마련하는 등 그에 해당하는 조처를 취해왔다.

연원 및 변천

1435년에 첫 친영 사례가 나온 이후 왕실에서나 사대부가에서 친영의 예를 따른 사례는 많지 않다. 사대부가를 대상으로 한 친영의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16세기 초인 중종대에 이르러서다.

1515년(중종 10) 10월 23일에 “혼인의 예가 바른 뒤에야 군신·부자의 도리가 따라서 바를 수 있거니와 우리나라는 예악(禮樂)으로서의 문물(文物)이 크게 갖추어졌으나 이 예만은 떨치지 못했다. 내가 『국조보감』을 보건대 조종께서도 행하고자 하셨다. 혼인은 만세의 시작인데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들러 가는 것은 천도(天道)가 역행하는 것이니 어찌 옳겠는가. 혼인의 예가 중하므로 조종께서 행하고자 하셨다는 뜻으로 전지를 내려라.”라고 하여 친영을 시행하라는 전교가 있었다(『중종실록』 10년 10월 23일).

그러나 이러한 전교가 있었다고 하여 일시에 기존의 풍속이 바뀐 것은 아니다. 1517년(중종 12) 11월 23일에 유용근(柳庸謹) 등은 “남귀여가(男歸女家)의 풍속은 버릇이 이미 오래되어 갑자기 바꾸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자연히 고쳐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중종실록』 12년 11월 23일). 그러나 이후에도 남귀여가의 풍속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그 결과 명종대에 와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반친영’이라 하여 고유의 민속과 『가례』의 친영을 절충한 것이다. 반친영은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머무는 오랜 관행을 인정한 것이지만 다음 날 바로, 또는 3일 후에 우귀(于歸), 즉 신부가 신랑 집으로 와서 시부모에게 예를 올리는 현구고례(見舅姑禮)의 의식을 갖는 방식이다.

절차 및 내용

『세종실록』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왕세자 친영의(親迎儀) 절차를 확인할 수 있다(『세종실록』 9년 4월 26일). 하루 전에 충호위가 왕세자의 위차(位次)를 빈씨(嬪氏)의 대문 밖 길 서쪽에 남향하여 설치하고, 시위하는 동궁 관원들의 위차를 왕세자 위차의 서남쪽에 동향하여 설치하되 북쪽이 위가 되게 한다.

당일이 되면 신시(申時) 초삼각(初三刻)에 사복(司僕)이 연(輦)을 광화문 밖 동쪽에 가까이 내어다 놓고 익위사가 소속 장의(仗儀)를 거느리고 진설하기를 보통 때와 같게 한다. 왕세자가 이미 임금의 명을 받고 근정문 밖에 나오면 우중호(右中護)가 인(印)을 짊어지고 앞을 인도하며, 좌우 시위들도 보통 때의 의식과 같게 한다. 좌중호(左中護)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광화문 밖에 나와 연을 타면 모시는 동궁 관원들도 말에 오르기를 마치고, 왕세자의 연이 움직이면 문무 여러 관원은 모두 말에 오르기를 보통 때의 의식과 같게 한다. 드디어 빈씨의 집으로 가는데 촉(燭)을 잡고 말 앞에서 시종(侍從)하기를 보통 때와 같이 한다.

왕세자의 연이 빈씨의 대문 밖 위차 앞에 이르면 좌중호가 연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연에서 내리기를 청하고 엎드렸다 일어나 모시던 자리로 돌아온다. 왕세자가 연에서 내려 위차로 가게 된다.

연이 장차 이르게 되면 주인은 사당에 고하고 초례(醮禮)를 『주자가례』와 같게 한다. 빈(嬪)명복(命服) 및 수식(首飾)을 차리고 동방(東房)에 서며, 시종은 보통 의식과 같이 한다. 주부(主婦)는 예복을 입고 마루[堂] 가운데 서쪽 가까이 남향으로 선다. 왕세자가 전안(奠雁)할 자리는 마루 가운데의 북향으로 설치하고, 주인은 공복(公服) 차림으로 대문 안에 나와 서향하여 서고 빈자(嬪者)는 공복 차림으로 주인의 왼편에 북향하여 선다.

좌중호가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자리에 나아가기를 청하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모시던 자리로 돌아간다. 왕세자가 위차에서 나와 문 서쪽에 동향하여 서고, 시위는 보통 때와 같이 한다.

빈자가 나아가 분부를 받고 문 동쪽에 나와 서향하여 말하기를, “감히 행사하기를 청한다.”고 하면 좌중호가 그 말을 받아 나아가 꿇어앉아 아뢰기를 보통 때와 같이 한다. 왕세자가 말하기를, “아무는 교지와 어명을 받들어 이번 초혼(初婚)을 행하겠나이다.” 하고, 좌중호가 엎드렸다가 일어나 빈자에게 전하여 들어와 고하면 주인은 말하기를, “아무는 삼가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고, 빈자가 나와 좌중호에게 전하여 아뢰기를 먼저와 같이 한다.

빈자가 주인을 인도하여 문밖 동쪽에서 맞이하되 서향하여 두 번 절하면 좌중호가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답배하기를 청하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모시던 자리로 돌아오고 왕세자가 답배하면 주인은 읍한다.

왕세자가 먼저 들어가면 장축자(掌畜者)가 기러기[雁]를 좌중호에게 주어 동남쪽으로 나아가 받들어 올리게 한다. 왕세자가 이미 기러기를 가지고 들어가게 되면 시위하는 사람은 인원수를 적당히 헤아리어 따르게 한다. 중문에 이르게 되면 주인이 사양하여 말하기를, “왕세자께서 먼저 듭시옵소서.” 하고, 왕세자는 이를 받아 “아무가 감히 먼저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한다. 또 말하기를, “왕세자께서 먼저 듭시기를 굳이 청합니다.” 하면 왕세자가 말하기를, “아무는 감히 먼저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여, 주인이 읍하면서 들어가면 왕세자가 따라 들어간다.

왕세자는 문에 들어서서 왼편으로 가고, 주인은 문에 들어서서 오른편으로 간다. 중문에서 주인이 읍하고 안채로 들어갈 때에 거의 몸을 굽혀 읍하고 섬돌에 이를 때에도 읍하는데, 왕세자가 모두 답례로 읍한다. 섬돌에 이르러서 주인이 왕세자에게 먼저 오르기를 청하면 왕세자는 “아무는 감히 사양합니다.” 하고 주인이 말하기를, “왕세자께서 오르시기를 굳이 청합니다.” 하면 왕세자는 말하기를, “아무는 진실로 감히 사양합니다.” 하고 주인이 또 말하기를, “왕세자께서 오르시기를 끝내 청합니다.” 하면 왕세자는 또 말하기를, “아무는 감히 끝까지 사양합니다.” 한다.

주인이 읍하고 왕세자도 답례로 읍하고서 주인이 동계[阼階]로 올라 서향하여 서고 왕세자는 서계(西階)로 올라 위차에 나아가 북향하여 꿇어앉아 전안하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재배하는데 주인은 답배하지 아니하고, 왕세자가 내려가서 나가는데 주인은 내려가서 전송하지 아니한다.

내구위(內廐尉)가 연을 중문 밖에다 모셔놓으면 부모(傅姆)가 빈을 인도하고 사칙(司則)의 앞을 지나 어머니의 왼편으로 나가는데, 부모는 오른편에 있게 되고 보모(保母)는 왼편에 있게 된다.

신부의 아버지가 조금 앞으로 나아가서 서향하고 경계하기를, “너의 옷과 너의 비녀를 반드시 바르게 하라.” 하고 명하여 말하기를, “조심하고 공경하여 낮이나 밤이나 본분에 어김이 없도록 하라.” 한다. 어머니는 서계 위에서 경계하되 옷깃을 여며주고 수건을 매어주면서 명하여 말하기를, “힘쓰고 공경하여 낮이나 밤이나 어김이 없도록 하라.” 한다. 여러 어머니들과 집안 어른들도 띠를 둘러주면서 부모님의 명하심을 거듭 부탁하여 명하기를, “공경하고 공손하게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본받아서 낮이나 밤이나 어김이 없도록 이 옷깃과 띠를 보고 생각하라.” 한다.

빈이 중문으로 나와서 연 뒤에 이르면 왕세자가 발[簾]을 쳐들고 기다린다. 모(姆)가 작별하여 말하기를, “잘 가르치지 못하여 족히 예(禮)를 드릴 수 없나이다.” 하고, 빈이 연에 오르면 모가 의복을 선명하게 하는 옷인 경(景)을 덧입혀준다.

왕세자는 대문으로 나와 연에 올라 환궁하는데 시위하는 것은 오던 때 의식과 같고 빈의 의장(儀仗)은 그 뒤로 선다. 주인은 빈의 시종으로써 그의 소속을 빈에게 보내 준다.

생활ㆍ민속적 관련 사항

남귀여제라는 고유의 민속과 『가례』의 친영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반친영’으로 절충하여 또 다른 풍속을 형성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다음은 『국조오례의』에 나오는 사대부 혼례 중 친영에 관한 내용으로 신부 집에서 전안례를 올린 후 신랑 집으로 옮겨 합근례(合巹禮)를 행하는 절차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합근례를 마친 후 우귀는 언제 하는지 등의 절차는 나와 있지 않다.

○ 만약 신부의 집이 먼데도 행례(行禮)를 요청한다면 신부의 집으로 하여금 가까운 곳에 신랑의 관사(館舍)를 설치하게 하고 신부의 집에 가서 맞아 와서 관사에 이르러 행례한다.

○ 기일(期日) 하루 전에 신랑 집에서 실내에 좌석을 두 곳에 설치하되 동쪽과 서쪽에서 서로 마주 보게 하는데, 신랑의 좌석은 동쪽에, 신부의 좌석은 서쪽에 있게 한다. 또 배례(拜禮)하는 좌석을 자리의 남쪽에 설치하고, 주탁(酒卓)을 실내의 조금 남쪽에 설치하고, 신랑 신부가 쓰는 술잔인 잔(盞)과 근(巹)을 그 위에 둔다.

○ 신부의 집에서 위차를 밖에 설치한다. 초저녁에 신랑이 성복(盛服)하고 주인이 사당에 고하기를 납채(納采)의 의식과 같이 한다.

○ 신랑이 말을 타고 횃불로써 앞에서 인도하여 의물(儀物)을 갖추고 신부 집의 대문 밖에 이르면 말에서 내려 들어가서 막차(幕次)에서 기다린다.

○ 주인이 나가서 신랑, 즉 사위될 사람을 문밖에서 맞이하여 읍양(揖讓)하고 들어오게 하면 신랑이 기러기를 잡고 따라 들어와서 당(堂)에 이른다. 주인은 동계로부터 올라가서 서향하여 서고, 신랑은 서계로부터 올라가서 북향하여 꿇어앉아 기러기를 땅에 두면 주인의 시자(侍者)가 받는다. 신랑이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두 번 절하면 주인은 답하여 절하지 않는다. 신랑이 서계로부터 내려가는데 주인은 내려가지 않는다.

○ 부모가 신부, 즉 딸을 받들어 나가고, 사위가 마침내 중문에 나가면, 신부가 이를 따르는데, 사위가 가마[轎]의 발을 들고 기다린다. 부모가 말하기를, “가르치지 못하여 예절을 차리지 못합니다.”고 한다. 이에 가마를 타고 횃불로써 앞에서 인도하는데, 신랑이 말을 타고 먼저 가고 신부가 다음에 따라가며 주인이 그 소속된 사람을 시켜 이를 보내게 한다.

○ 신랑이 자기 집에 이르러, 신부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인도하여 들어와서 신랑이 신부에게 읍(揖)하여 좌석에 나아가게 한다. 신부가 두 번 절하면, 신랑이 답하여 절한다. 신랑이 신부에게 읍하여 자리에 나아가 앉게 하면, 종자(從者)가 찬과(饌果)를 설치하고 술을 따른다. 신랑과 신부가 술을 땅에 부어 제사 지내고는 술을 들어 마시고 안주를 든다. 또 술을 따르면 신랑과 신부가 술잔을 들어 마시고 안주를 든다. 또 근을 취하여 술을 따르면 신랑과 신부가 술을 마시고 안주를 든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