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복(公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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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리들이 입던 예복의 하나.

개설

공복(公服)은 매달 초하루와 15일, 즉 삭망(朔望)의 조하(朝賀) 및 현사(見辭)·사은(謝恩)·복명(復命)을 할 때 관리들이 입는 옷으로, 복두(幞頭)·포(袍)·홀(笏)흑화(黑靴)로 구성되어 있는 복장이다.

연원 및 변천

1426년(세종 8) 예조(禮曹)와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에서 고려시대 조정의 관복 제도를 조사해 놓은 것을 보면, 1369년(고려 공민왕 18) 공민왕에게 내린 관복의 자문(咨文)에는 시사복으로 정해진 오사모(烏紗帽)와 단령삼(團領衫), 속대(束帶)를 공복이라 하였으며, 상복(上服)과 공복이 같이 착용되었다. 그 후 1402년(태종 2)의 방문(榜文) 가운데, 공복은 둥근 깃[盤領]·우임포(右衽袍)이며, 복두를 쓰고 홀(笏)을 들고 대(帶)를 띠며, 흑화를 신는다고 하여 공복의 관모가 복두(幞頭)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정에서는 당과 송의 제도에 따라 관복 제도를 마련하였는데, 그 대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왕세자는 복두에 홍포(紅袍)를 입고 서대(犀帶)를 띠며, 상홀(象笏)을 들고 흑화를 신는다. 또한 문무백관은 그 등급에 따라 차등을 두었는데, 1품은 홍포(紅袍)와 서대(犀帶)에 상홀(象笏)을 들며, 2품 이하 정3품 이상은 홍포와 여지금대(荔枝金帶)에 상홀을 든다. 종3품 이하는 청포(靑袍)와 흑각대(黑角帶)에 상홀을 들며, 5·6품은 청포와 흑각대에 목홀(木笏)을 든다. 7·8·9품은 녹포(綠袍)를 입고 흑각대를 띠며 목홀을 든다. 복두를 쓰고 흑화를 신는 것은 모두 같다.

1471년(성종 2) 예조에서, 왕세자는 삭망의 조하와 정지(正至)·생신[生辰]에 하례를 받을 때 공복을 갖추는데 군신의 공복과 분별이 없어 불편하다고 아뢰었다(『성종실록』 2년 6월 15일). 이에 1488년(성종 19) “왕세자와 백관의 공복이 다름이 없다고 하나 왕세자의 공복에는 옥대가 있음으로 분별할 수 있다.”(『성종실록』 19년 2월 21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왕세자는 공복에 옥대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493년(성종 24) 삭망의 조하 때 왕세자의 공복이 조복으로 바뀌었으며, 정조·동지·생신에 하례를 받을 때 입었던 공복도 면복을 갖추고 있어 왕세자의 공복 착용이 점차 축소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성종실록』 24년 3월 14일).

문무백관의 공복은 1418년(태종 18) 양부(兩府) 이하 문무백관이 세자전에 나아가 하례를 드릴 때 착용하였다. 1429년(세종 11) 문무과 전시의에서 집권 내시(內侍)는 공복을 입고, 제생(諸生)도 공복을 입고 들어와서 제자리에 나아갔으며, 신급 내시는 공복을 입고 삼일유가(三日遊街)를 하였다. 1446년(세종 28)에는 제사와 서계(誓戒)에 공복을 착용하였다. 또한 1454년(단종 2) 납채의(納采儀)를 행할 때 내직 별감(別監) 2인이 공복을 착용하였으며, 대전(大殿)의 존호를 올리는 의식에서 영사(令史) 2인이 공복을 입었다.

1459년(세조 5) 예조에서 고례(古禮)를 참조한 뒤 복제와 관련하여 “『제사직장(諸沙職掌)』을 상고해 보니, ‘문무관의 조복(朝服)은 경사스럽고 좋은 대사(大事)·정조(正朝)·동지(冬至)·성절(聖節) 및 반강(頒降)·개독(開讀)·조사(詔赦)·진표(進表)·전제(傳制)에는 이를 입게 되고, 공복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조회하고 주사(奏事)할 때나, 시반(侍班)·사은(謝恩)·현사(見辭)할 때에 이를 입게 된다.’ 했으며, 또 지금 온 주문사(奏聞事)의 『문견사목(聞見事目)』에는, ‘초하루와 15일에 조하할 때에 황제는 피변(皮弁)을 쓰고 조포(皂袍)를 입으며, 황태자는 익선관(翼善冠)과 홍포(紅袍)를 갖추며, 여러 신하들은 공복을 입는다.’고 했으니, 청컨대 지금부터는 중국 조정의 제도와 본국(本國)에서 이미 시행한 격례(格例)에 의거하여, 종친(宗親)과 문무백관들은 경사스럽고 좋은 대사(大事)·동지(冬至)·정조(正朝)·성절(聖節)·영조(迎詔)·반강교서(頒降敎書)·탄일배표(誕日拜表) 외에 초하루와 15일의 조하 및 현사(見辭)·사은(謝恩)·복명(復命)할 때에는 모두 공복(公服)을 입도록 하소서.”라고 아뢰므로 그대로 따랐다고 하였다(『세조실록』 5년 9월 7일).

또한 1460년(세조 6) 친영의(親迎儀)를 행할 때는, 시종관과 궁관·종친·문무백관이 공복 차림으로 광화문을 나가서 말을 타고 따라갔으며, 이때 빈자(儐者)도 공복을 입었다(『세조실록』 6년 4월 18일). 왕녀의 하가의(下嫁儀)에서 사위는 공복으로 성장하는데, 사치를 금단하기 위하여 1541년(중종 36)에 의복을 명주와 면포로 장만하였다(『중종실록』 36년 12월 29일).

제사를 지낼 때에도 공복을 입었다. 1420년(세종 2) 사후토의(謝后土儀)를 지낼 때 제사를 시작하게 되면 집사자는 제각기 공복 차림으로 있었으며, 1423년(세종 5)부터는 원단(圓壇)·사직·종묘의 제사에 서계(誓戒)할 적에 모두 공복을 착용하였다. 그러나 1601년(선조 34) 조하할 때의 복식은 의당 공복을 입어야 함에도 초초한 백관들의 관복도 겨우 갖추는 형편이어서 공복의 착용은 열에 한둘도 없다고 하였다(『선조실록』 34년 3월 18일). 따라서 문무백관들의 공복은 임진왜란 이후 감소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공복 착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1613년(광해 5) 봉자전(奉慈殿) 제사의 복식과 관련한 논의에서도 배제관(陪祭官)은 모두 공복을 착용하였으며(『광해군일기』 5년 4월 7일), 1815년(순조 15)에는 영릉(永陵) 이하 능·원·묘(墓)·궁·묘(廟)에는 모두 포공복(布公服) 차림으로 행사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당시에는 포로 만든 공복이 최복(衰服)으로 착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순조실록』 15년 12월 28일).

형태

1426년(세종 8) 예조의 방문(榜文)을 보면, 공복은 반령·우임포로 저사(紵絲)·사라(紗羅)·견(絹) 등 적당한 것을 사용하여 만들며, 소매 넓이는 3자이고, 1품에서 4품까지는 붉은 포[緋袍], 5품에서 7품까지는 청색 포, 8품에서 9품까지는 녹색 포로 하였으며, 복두(幞頭)는 칠사(漆紗)로 2등 전각(展角)을 쓰고, 각기 길이는 1자 2치라고 되어 있다.

홀은 조복과 같이하여 4품 이상은 홀을 쓰고, 5품 이하는 나무를 쓴다. 요대(腰帶)는 1품은 옥을 사용하는데, 꽃을 조각하기도 하고 그대로 두기도 한다. 2품은 서각(犀角)을 쓰며, 3·4품은 금려지(金荔枝)를 쓰며, 5품 이하는 오각(烏角)을 쓰고 청색 가죽을 사용하는데, 그대로 아래에 달미(撻尾)를 늘어뜨리고 신은 흑화를 신는다고 하였다.

1793년(정조 17)에는 공복의 소매와 깃의 폭이 점점 넓어져서 옛 제도에 어긋나자 공복의 소매를 줄이고자 하였다(『정조실록』 17년 10월 11일). 또한 1884년(고종 21)에는, “공복제도는 본래 고제가 아닐 뿐 아니라 지금은 법도가 문란하고 습속이 타락하여 떨쳐 일어날 기약이 없기 때문에 고제를 원용하고 지금의 것을 참작하여 번잡한 것을 제거하라.”는 전교가 내렸다(『고종실록』 21년 6월 25일).

용도

공복은 왕세자와 문무백관, 향리(鄕吏), 전악(典樂) 등의 관리들이 공적인 행사에 참여할 때 입는 관복이다. 왕세자는 친영의를 할 때와 삭망의 조하에 공복을 착용하였으며, 문무백관은 왕을 알현하거나 사은 또는 부임 전 배사할 때와 세자전에 하례를 올릴 때도 착용하였다. 왕세자가 입학을 할 때 박사는 공복을 착용하며, 종친들이 입학하는 의식에도 교관이 공복을 착용하였다. 왕세자의 납빈의·납채의를 거행할 때는 별감이 공복을 입었으며, 왕세자와 왕세손을 책봉하는 의식에서는 교명안(敎命案)을 든 자도 공복을 입었다.

왕녀와 왕자가 혼인할 때 사위와 대군은 공복으로 성복(盛服)을 했으며, 급제자는 공복을 입고 삼일유가(三日遊街) 의식을 행했다. 제사를 지낼 때 집사자(執事者)와 배제관은 공복을 착용하며, 제악을 행할 때는 전악이 공복을 착용하였다. 지방의 향리도 공복을 착용하였다. 이상의 용도로 보아 조선후기로 가면서 공식적인 행사를 진행하는 집사자(執事者)·거안자(擧案者)·전교관(傳敎官)·전악·향리·별감 등이 주로 공복을 착용하였으며, 왕세자와 문무백관의 공복 착용은 줄어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