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복(朝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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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백관이 국가 조회, 또는 국가 잔치에 예복으로 착용하였던 복식 일습.

개설

조복은 금칠한 양관(梁冠) 때문에 ‘금관조복(金冠朝服)’이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초기에는 제용감(濟用監)에서 조복을 제공하고 관리하였으나, 중종대 이후부터 개인이 조복을 장만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초기에는 1품에서 9품까지 모두 조복을 착용하였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는 과정에서 모든 관원이 조복을 구비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4품 이상만 조복을 사용하고 5품 이하는 흑단령을 착용하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조선시대 내내 유지하였다.

조선초기의 조복은 적초의(赤綃衣)와 훈상(纁裳) 외에 홀(笏), 양관(梁冠), 중단(中單), 폐슬(蔽膝), 수(綬), 패(佩), 대(帶), 말(襪), 이(履) 일습으로 구성되었다. 양관의 양(梁)의 수, 후수의 무늬와 환의 재료, 품대 등에 따라 품계를 구분하였다.

조복 구성물에 대한 도설(圖說)은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와 『대한예전(大韓禮典)』에만 있지만, 기본 구성이 제복과 유사하였기에 조선초기 『세종실록』「오례의」와 『국조오례서례(國祖五禮序例)』 등의 제복도설(祭服圖說)을 참조하여 조복 제도를 유추할 수 있다. 또한 1627년(인조 5) 12월 흥경원(興慶園) 이장 시의 기록인 『원종예장도감의궤(元宗禮葬都監儀軌)』에 제시된 조복 도상을 통하여 일부 구성물의 색상과 실질적인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조복 구성물에 변화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변화는 신발과 중단, 후수의 문양과 착장 방식, 폐슬 등에서 확인된다. 신발 이(履)는 화(靴)로 변화하였고 중단은 검은 선장식의 백색 중단에서 선장식이 없는 창의가 사용되다가 검은 선장식의 남색(청색) 중단으로 변화되었다. 후수는 운학(雲鶴)과 반조(盤鵰), 연작(練鵲), 계칙(鸂鷘) 등의 문양으로 품계를 구분하였으나, 후기에는 모두 운학으로 통일하였다.

착용하는 방법도 폐슬과 함께 고리에 끈을 끼워 착용하던 방식은 사라지고 대대(大帶)에 고정시켜 사용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폐슬은 19세기 말, 적초의의 좌측 가슴에 달아 폐흉(蔽胸)이라고 할 정도로 크기가 줄어들었다.

조복의 착장 방식은 기본적으로 바지와 저고리, 중치막 등의 간단한 포(袍)를 입고 버선[襪]과 행전, 흑화(黑靴)를 착용한다. 중단을 입고 훈색(纁色)의 상(裳)을 두른다. 무릎 정도 길이의 적초의를 착용한 후, 그 위에 대대를 두르고 폐슬과 후수를 각각 앞뒤에 착용한다. 혁대의 양 허리에는 패옥(佩玉) 주머니를 걸고 양관을 쓴 후, 홀을 든다.

연원 및 변천

1416년(태종 16) 3월, 문무백관의 조복을 홍무예제(洪武禮制)에 의하여 양관(梁冠)과 의(衣)·상(裳), 패(佩)·수(綬)를 제정하였다. 명나라의 규정보다 2등급 낮추게 된 것이었다. 조선초기 백관의 조복은 1408년(태종 8) 명으로부터 받은 세자의 조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1426년(세종 8)의 기사에 따르면 1408년에 하사받은 세자의 조복은 오량관(五梁冠), 적라의(赤羅衣), 백사중단(白紗中單), 적라상(赤羅裳), 폐슬, 혁대(革帶), 패, 수, 백말(白襪), 흑리(黑履), 상홀(象笏)이었다(『세종실록』 8년 2월 26일).

이후 1426년(세종 8) 중국에서 내려준 관복의 등급과 문헌을 기초하여 백관의 관복 제도를 확정하였는데, 이 규정이 기본이 되어 1485년(성종 16)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조복 제도로 완성되었다. 양관에 사용하는 목잠(木簪)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소재는 나(羅)에서 초(綃)로 바뀌었다.

초기의 조복 제도에서는 1품부터 9품까지 모두 조복을 입었지만, 임진왜란 직후 경제적 곤란으로 나라에서 조복을 마련해 주는 경우도 있었고 흑단령으로 대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1651년(효종 2)에 선조와 인조 두 조정에서 대례를 행할 때, 4품 이상은 조복을 착용하고 5품 이하는 흑단령을 착용하도록 한 것에 근거하여 이 규정을 제도화하였다(『효종실록』 2년 6월 14일).

조복 제도는 왕조 말기까지 『경국대전』의 제도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부분적인 변화가 있었다. 이미 16세기 중종대에는 당시의 변화된 명나라 제도를 수용하여 신발 이를 흑화로 바꾸었다. 그리고 17세기 이후에는 흑선을 두른 백색 중단을 대신하여 선장식이 없는 옥색 창의를 사용하였다. 이는 1791년(정조 15) 채제공(蔡濟恭)의 조복본 초상화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현존하는 대부분의 중단 유물은 남색(청색)에 흑선을 두른 것인데, 이러한 제도는 순조대 이후에 수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초기에 품계별로 구별되었던 후수의 문양도 17세기 이후로는 선학(仙鶴) 문양으로 통일되었다. 대신 선학의 개수에 차이를 둔 듯하다. 유물은 출토복식 중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의 신경유(申景裕) 묘 출토 유물과 밀창군 이직(李樴) 묘의 유물 등 17, 18세기의 유물이 있으며 전세 유물은 중요민속자료 제2호 심동신(沈東臣) 금관조복을 비롯한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해당하는 유물이 있다.

대한제국(1897) 반포 후, 『대한예전(大韓禮典)』에서는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참고하여 백관의 조복을 명나라의 문무백관의 관복 제도와 동일하게 개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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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

1) 양관 : 제도상 제복(祭服)과 조복에 동일한 양관을 사용하였으나, 실제로는 조복에 금칠을 한 양관을 사용하였다. 양관은 머리둘레를 싸는 아랫면[冠武]과 둥글게 머리 위를 덮는 검정색 모(帽)에 금색의 종선이 놓이는 양주(梁柱), 관의 뒷면을 정식하는 판인 배면(背面), 관을 가로지르는 목제 비녀인 목잠(木簪)으로 이루어진다. 착용 시 관무 좌우 끝에 달린 끈으로 관의 전체 둘레를 머리에 맞게 조일 수 있으며 양관에 비녀[木簪]를 꽂은 후 끝에 술이 달린 청색의 다회(多繪)를 비녀에 감아 가슴까지 길게 늘어뜨리거나 턱 밑에서 묶었다.

초기에 1품은 오량관, 2품은 4량관, 3품은 3량관, 4~6품은 2량관, 7~9품은 1량관을 사용하였으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5량과 3량만 있다는 기록도 보인다. 대한제국 때는 명나라 제도를 따라 7량관에서 1량관까지로 규정하였다. 왕조 말기 양관의 높이는 대략 20~22㎝ 내외인데, 시대에 따라 높이에 변화가 있었다.

2) 의 : 적초의라고도 하는 붉은 포인데 곧은 깃 혹은 당코목판깃에 동정이 달렸으며 소매가 넓고 겨드랑 아래로 긴 옆트임이 있다. 깃, 수구, 도련에 흑색 선장식이 있다. 현존하는 유물들의 길이는 100㎝ 전후이다.

3) 폐슬 : 붉은색의 무릎가리개로 공경의 표시로 사용되는 상징물이다. 문양은 없으며, 사다리꼴의 모양에 선 장식이 있다. 폐슬 도상에는 끈을 꿸 수 있는 고리가 있으며, 『대한예전』에서는 혁대에 폐슬을 철(綴)하게 되어 있다. 폐슬 유물은 붉은 색이며 가선은 없다. 모양도 다양하여 적초의의 도련이 직선인 경우는 폐슬도 직선이며, 도련이 곡선인 경우에는 폐슬도 곡선화 경향을 보인다. 또 국말에는 의제의 간편화로 조복 가슴 부위에 소형의 폐슬이 부착되었다.

4) 상 : 적초상이라고도 하며 전 3폭 후 4폭 형태이다. 허리에는 주름이 잡혀 있으며 가장자리에 흑색 연(緣)을 둘렀는데 그 사이에는 흰색 실선을 더하였다. 초기에는 흑선을 두른 치마 조각에 윗부분에만 주름을 잡았으나, 영조대 이후 아래까지 칼주름을 잡았다. 그리고 말기에는 칼주름을 잡은 후 흑선을 둘러서 간편한 형태가 되었다.

5) 중단 : 적초의 속에 입는 받침옷이다. 넓은 소매의 긴 포 형태인데, 초기에는 백색 중단을 입었다. 17세기 이후 창의를 중단으로 입게 되었으나, 순조대 이후에는 남색에 흑선을 두른 학창의를 중단으로 사용하였다.

6) 패 : 옥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패옥이라고도 한다. 덕(德)의 상징물이다. 혁대의 양 허리에 차는데, 옥을 보호하기 위해 주머니 안에 넣어 패옥을 걸었다. 3품 이상 번청옥을, 4품 이하는 번백옥을 사용하였다.

7) 수 : 후수라고도 하였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1·2품용 후수는 황(黃)·녹(綠)·적(赤)·자(紫)의 4색사(色絲)를 사용한 운학 화금(花錦)에 금환(金環) 2개를 달고 끝에는 청사망(靑絲網)을 단다고 기록되어 있다. 3품은 반조화금(盤雕花錦)에 은환(銀環)을, 4~6품은 연작화금(練鵲花錦)에 은환을 장식하였다. 7품 이하는 계칙에 동환(銅環)을 사용하였다. 현존하는 유물은 홍색 단(緞)이나 전(氈)을 사용하였다. 유정량(柳廷亮) 묘에서 출토된 후수는 겉감에 운학과 함께 세로축으로 좌우 가장자리에 넓게 모란 등의 화문(花紋)을 수놓았으며 고리에 끈을 끼워 허리에 고정시키는 형태이다. 신경유 묘의 후수는 망수까지 부착되어 있다. 반면 밀창군의 후수는 2쌍의 운학을 수놓았으며, 흰색의 넓을 끈을 달아서 허리에 묶는 방식이다. 국말 유물은 제도와는 달리 모두가 운학이며, 2쌍에서 5쌍으로 차이를 보인다.

8) 대대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에 제시된 도상은 긴 끈을 묶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신경유 묘 이후의 대대 유물이나 초상화의 대대는 모두 ㄇ 형태이다. 국말에는 착용이 간편하도록 대대에 후수를 고정시켜서 사용하였다.

9) 화 : 초기 제도는 이(履)를 착용하는 것이었으나, 1508년(중종 3) 이후 중국의 변화된 제도를 취하여 화로 바꾸었다.

10) 말 : 백색 버선이다. 전례서의 도상에는 버선목에 끈이 묘사되어 있다.

11) 혁대 : 대대 위에 두르는 품대인데, 좌우에 폐슬을 걸었다. 1품은 서대를, 2품은 금대, 3~4품은 은대를, 5품 이하는 흑각대를 사용하였다.

12) 홀 : 손에 드는 의물인데, 본래는 기록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1~4품은 상홀, 5품 이하는 목홀을 사용한다고 하였는데, 『종묘의궤(宗廟儀軌)』에는 품계에 관계없이 목홀을 사용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용도

조복은 문무백관의 조하복(朝賀服)으로, 대사(大祀)정조(正朝), 동지(冬至), 및 조칙(詔勅)을 반포(頒布)할 때, 또는 진연(進宴)에, 그리고 왕실 가례 시에 착용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대한예전(大韓禮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高光林, 『韓國의 冠服』, 和成社, 1990.
  • 문화재청·한국문화재보호재단 편, 『조선조 숙종인현후 가례의 연구』, 2004.
  • 柳喜卿, 「後綬小考」, 『服飾』8, 1984.
  • 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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