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正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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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초하룻날 아침.

개설

정조(正朝)에는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많은 행사가 있다. 정조문안(正朝問安)은 정월 초하룻날 조신(朝臣)들이 왕에게 문안하고, 각 집안에서는 젊은이들이 어른을 뵙고 절하는 것이다.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지내는 제사를 정조제(正朝祭)라고 한다. 정조하례(正朝賀禮)는 이날 아침에 백관(百官)이 국왕에게 하례하는 의식이다.

정조호장(正朝戶長)이란 정조에 궐문에 나아가서 왕에게 숙배하며 문안드리는 호장을 말한다. 매년 정조에는 각 고을의 수리(首吏) 1명이, 경사(慶事)가 있을 때는 왕의 관향(貫鄕)과 왕비의 내외향(內外鄕)에 해당하는 수리 1명이 궐문에 와서 숙배한다.

정조는 삼명일(三名日), 또는 삼명절(三名節)의 하나이다. 다른 둘은 동지와 국왕의 탄일이다. 삼명일에는 먼 지방에 나가 있는 사신이나 수령이 그곳 객사의 전패(殿牌)에 절하며 왕에게 하례를 드리는데, 이것을 요하(遙賀)라고 한다. 동지·정조·국왕의 탄일 등의 삼명일과 진하(進賀)하는 날에 옷감을 바치는 일을 진표리(進表裏)라고 한다.

중국에 대한 연례 절사는 매년 동짓날을 기하여 예물을 가지고 중국에 가는 사신을 말하는데, 이 행차를 통해 정조와 성절(聖節)의 하례를 아울러 행하게 된다. 이런 행차를 절행(節行)이라고도 한다.

내용 및 특징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설날과 동짓날에 모두 왕이 어전으로 나와 하례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때가 되면 신하들은 행사를 치르려 하지만 그때마다 대개는 국왕이 임의로 정지시키고 행사를 못하게 지시한다. 그 이유는 조선 왕조의 법도가 겸손하고 검소한 것을 서로 받들므로 비록 문서로는 예법이 존재함을 밝혀 두지만 실제로는 이를 생략하여 간편하고 꾸밈없음을 쫓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조오례의』가 마련한 절차는 다음과 같다.

하루 중 밝고 맑은 때를 골라 의정부(議政府) 대신이 왕에게 새해 문안을 드리기 위해 종친과 문무백관 중 2품 이상 신하를 인솔하여 인정전 뜰 품계석 아래 문무를 가려 순서대로 선다. 승지 1명과 사관 2명이 나아가 각 궁전의 승전중사, 즉 내시에게 청을 넣으면 중사는 대전에서 나와 대신 앞에 무릎을 꿇는다. 대신 이하 모두 무릎을 꿇고 대신이 대표로 “정조에 문안드립니다.”라고 구두로 전한 후 새해를 축하하는 전문(箋文)과 표리(表裏)를 올린다. 외관직인 전국 팔도의 관찰사·병사·수사·부사·목사 등도 전문과 토산물을 진상하며, 주·부·군·현 등의 호장과 아전도 모두 와서 반열에 참석한다.

변천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고려 때는 정조에 대외적으로는 주로 여진족이 방문하여 그들의 토산물을 바쳤다. 대내적으로는 일세지수(一歲之首)라고 하여 각 처에서 올린 표문(表文)이 왕에게 올라왔다.

고려시대에 제사와 관련한 절일(節日)로는 1015년(고려 현종 6) 정월 초하루와 5월 단오에 돌아가신 조부모와 부모에 대한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형법(刑法)」 금형(禁刑)조에는 고려의 속절(俗節)로 원정(元正)·상원(上元)·한식(寒食)·상사(上巳)·단오(端午)·팔관회(八關會)·추석(秋夕)·중구(重九)·동지(冬至)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제례, 특히 묘제가 보편화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정조·단오절 및 전통적인 유두절 외에 제례와 관련된 다른 속절이 더 있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조선에서는 왕실과 달리 일반 사가에서 정조를 속절로 여기기도 하고 명일의 하나로 분류하는 경우도 보인다. 이언적(李彦迪)의 『봉선잡의(奉先雜儀)』에서는 정조·한식·단오·중추·중양 등을 속절로 여겨 아침 일찍 사당을 찾아 천식(薦食)하고 이어 묘 앞에서 전배(奠拜)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이(李珥)는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속절을 정월 십오일·삼월 삼일·오월 오일·유월 십오일·칠월 칠일·팔월 십오일·구월 구일 및 납일(臘日)로 보고, 이와는 별도로 사명일인 정조·한식·단오·추석 등에 묘제(墓祭)를 행한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격몽요결(擊蒙要訣)』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봉선잡의(奉先雜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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