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호장(正朝戶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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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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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조호장 |
한글표제 | 정조호장 |
한자표제 | 正朝戶長 |
관련어 | 상계리(上計吏), 섭호장(攝戶長), 안일호장(安逸戶長) |
분야 | 사회/사회구성원/중인 |
유형 | 집단·기구 |
집필자 | 김현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조호장(正朝戶長)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2년 5월 25일, 『영조실록』 20년 7월 1일, 『영조실록』 37년 1월 3일, 『정조실록』 4년 1월 1일 |
조선시대에 각 지방 관아의 향리를 은퇴한 후 자신의 지역을 대표하여 정초에 국가의 조회에 참여하던 호장.
개설
정조호장(正朝戶長)의 ‘정조(正朝)’는 ‘정초에 조회에 참여한다’는 의미이고 ‘호장(戶長)’은 향리의 수장(首長)을 가리킨다. 즉, 정조호장은 그 지역을 대표하여 정초에 왕의 조회에 참여하는 자격을 가진 호장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정조호장은 정초에 예궐숙배(詣闕肅拜)하는 직무에서 연원된 것으로 국가의 경조사 때에 군현을 대표해 상경하여 숙배했다. 고려시대에는 상계리(上計吏)의 구실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직 및 역할
성종대에는 향리직을 격려하는 의미에서 포장(褒奬)의 뜻으로 은퇴한 향리에게 각 지방 관아에서 진성(陳省)을 올려 섭호장(攝戶長), 정조호장(正朝戶長), 안일호장(安逸戶長) 등의 직첩을 주도록 규정하였다(『성종실록』 2년 5월 25일). 이는 『경국대전』에도 그대로 수록되었다.
변천
조선중기 이후 정조호장은 형식적인 직임에 지나지 않으니 일시적으로 폐지하자는 주장도 있었다(『영조실록』 20년 7월 1일). 이후 영조와 정조는 조회하러 온 정조호장을 직접 불러 권농과 진휼, 폐단 등을 묻는 등 백성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였다(『영조실록』 37년 1월 3일) (『정조실록』 4년 1월 1일).
참고문헌
- 이훈상, 『조선 후기의 향리』, 일조각, 1990.
- 김준형, 「조선시대 향리층 연구의 동향과 문제점」, 『사회와역사』27, 1991.
- 김필동, 「조선 후기 지방 이서 집단의 조직 구조(上): 사회사적 접근」, 『한국학보』28, 1982.
- 김필동, 「조선 후기 지방 이서 집단의 조직 구조(下): 사회사적 접근」, 『한국학보』29, 1982.
- 이성무, 「조선 초기의 향리」, 『한국사연구』5, 1970.
- 이수건, 「조선조 향리의 일연구: 호장(戶長)에 대하여」, 『(영남대학교)문리대학보』3,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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