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화(黑靴)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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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흑화 |
한글표제 | 흑화 |
한자표제 | 黑靴 |
동의어 | 목화(木靴), 혁피화(赤皮靴), 흑피화(黑皮靴), 흑화(黑鞾), 흑화자(黑靴子) |
관련어 | 협금화(挾金靴) |
분야 | 생활·풍속/의생활/이 |
유형 | 의복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최은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흑화(黑靴) |
신목이 있는 것 중 흑색의 신.
내용
화(靴)는 『석명(釋名)』 석의복조(釋衣服條)에는 “화는 혜(鞋)이니 양족이 각각 일혜로 기마에 편리한 신이며, 조무령왕(趙武靈王)이 처음 사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화는 바닥은 나무나 가죽으로 하고 신목은 전(氈)이나 가죽·융 또는 금단(錦緞)으로 겉을 씌우고, 솔기에는 홍색 선을 둘렀으며, 모양은 반장화와 비슷하여 목이 길고 넓적하다.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완전히 가죽으로 만들던 것을 뒤에 전으로 내장하고 청금선(靑錦縇)을 둘러 밖에 보이게 하고 고급품은 금단으로 꾸미며 장화의 모양을 유지하기 위하여 발목까지 나무를 대어 목화(木靴)라고 불렀으며 상복에 신었다고 하였다.
『구당서(舊唐書)』 「지제(志第)」에 악공이 혁피화(赤皮靴)를 신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실제로 쌍영총 후실 벽화에도 벗어 놓은 화를 볼 수 있고, 동벽 벽화 9인 행렬도 중 3명도 화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송(宋)의 신종(神宗)으로부터 화가 보내졌고, 관복 개정 시에 흑피화로 개정되었다. 목화에 대한 금제를 1420년(세종 2) 5월 『세종실록』 갑인조에서 보면, 대소 승려와 서울의 별군(別軍) 내의 대장(隊丈) 이하 및 근장(近仗)·대장(隊仗)·대부(隊副)·보충군(補充軍)·조예(皂隸)·장수(杖首)·소유(所有)·갈도(喝道)·나장(螺匠)·도부외(都府外)·서인(庶人)과 공인(貢人)·상인(商人), 공(公)·사(私)·천인(賤人) 등은 신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무공(武工)과 악공(樂工), 도청(道廳) 안의 7품 이하는 풍악을 연주할 때 외에는 신지 못하고, 각전별감(各殿別監), 소친시(小親侍) 등은 입번할 때 외에는 신지 못하게 금하고 있다. 세종 때에는 왕세자 공복에 흑화를 신었으며, 인조 때 왕비의 법복에 흑피화를 신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경국대전(經國大典)』 의장조에는 1품에서 9품까지 문무백관의 공복에 흑피화를, 당상관은 상복(常服)에 협금화(挾金靴)를 신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말기에는 흑피화 대신 목화가 많이 착용되었다. 전하는 유물로는 순종이 어렸을 때 신은 목화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용례
是以未受誥命 而服冕服不可也 今宜着無胸背無文鴉靑紗團領 帶用無畫金黑鞓不鈒玉帶 靴用黑靴 其於喪中迎命之禮 爲合矣[『문종실록』 즉위 5월 23일 1번째기사].
참고문헌
- 유희경, 『한국복식문화사』, 교문사, 2001.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靴·鞋·履』,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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