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庶人)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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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서인 |
한글표제 | 서인 |
한자표제 | 庶人 |
관련어 | 서민(庶民), 평민(平民) |
분야 | 사회/사회구성원 |
유형 | 개념용어 |
집필자 | 임민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서인(庶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0년 9월 14일, 『세종실록』 19년 5월 14일, 『태종실록』 15년 4월 19일, 『성종실록』 3년 7월 13일, 『태종실록』 8년 5월 27일, 『태종실록』 9년 12월 6일, 『태조실록』 1년 9월 24일, 『태종실록』 8년 4월 16일, 『세조실록』 7년 4월 27일 |
조선시대 천인을 제외한 피지배 계층 신분의 통칭.
개설
서인(庶人)은 조선시대에 관직·관품자가 아닌 무품·무직자(無品無職者)를 가리키는 법제적 용어이며, 사족(士族)과 그 사족에 인접하는 신분으로서 사족과 대칭적 위치에 있는 집단을 가리킨다. 이들은 농·공·상인(農工商人)과 평민으로서의 국역(國役) 담당자를 아우르는 범주의 신분이었으며, 그 하위에 천인 신분이 존재하였다.
내용 및 특징
서인이 무직자라는 것은 관직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한 사실은 1428년(세종 10) 제사 대수(代數)의 신분별 차등을 논할 때의 기사에서 살펴볼 수 있다. 6품 이상은 삼대(三代)를, 7품 이하는 이대(二代)를, 서인은 다만 부모만을 제사 지낸다고 한 것이다(『세종실록』 10년 9월 14일). 이를 통해 보면, 서인은 엄밀하게 말하면 무직자가 아니라 무품자(無品者)라고 해야 맞는다. 그런데 양반이 품계가 없으면 그들도 서인이라고 호칭하는데, 이 경우 서인은 신분상의 용어가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때의 서인은 무품자를 가리키는 단순 호칭에 불과할 뿐 신분 개념상으로는 양반에 속한다. 실제로 교리(校理)이함녕(李咸寧)이 죽고, 함녕의 아들 이장생(李長生)은 벼슬이 없었는데, 겸판예조사(兼判禮曹事)허조(許稠)는 "서인의 예(例)로 해야 할 것"이라고 한 바 있다(『세종실록』 19년 5월 14일).
무품·무직자로는 생원·진사·유학 등 유생 직역(職役)들이 있다. 이 유생들은 서인이라 호칭해야 합당할 것이나, 이들을 서인이라 지칭하는 사례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따라서 서인은 이 두 신분층을 나타내는 개념이지만 사족 내의 서인과 일반 서인은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서인은 예제(禮制) 질서 사회에서 여러 가지 차별을 받는 신분이었다. 농사(農舍)의 크기, 집터 및 분묘의 크기, 집의 간각(間閣)과 척수(尺數), 복식(服式) 등에서 신분에 따라 등급이 구별되었는데,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거의 대부분 품직자와 서인으로 구별되었다. 이들 간에는 상하(上下)와 존비(尊卑), 귀천(貴賤)의 등급이 있었다. 이것은 일상생활의 각종 규제에도 적용되었으며, 그 표현은 항상 차등적(等差的) 차별을 나타냈다. 품직자는 보다 큰 단위로 묶을 경우에 경·대부·사(士)가 되는데, 이들이 관료로서 지배적 지위에 있는 양반이었다.
양반 신분이 아닌 서인은 평민처럼 국역(國役) 대상자였다. 각 도에 산재해 있는 관민(官民)의 자서제질(子壻弟姪: 아들과 사위와 아우와 조카)이 시위군(侍衛軍)과 기선군(騎船軍)에 정속(定屬)된다면 조사(朝士)가 될 수 없으므로 영구히 서인이 되는 자가 더욱 많아질 것이라고 한 기사에서(『태종실록』 15년 4월 19일)서인은 시위군과 기선군 등의 군역을 부담하였으며 조사가 될 수 없는 신분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서인은 군사(軍士)와 병칭되기도 하였다. 부모의 참최(斬衰) 3년상에 "군사와 서인은 100일의 복을 입는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성종실록』 3년 7월 13일). 『경국대전』에도 군사와 서인의 복상 기한이 100일로 규정되어 있다. 군사 중에서 사족 출신은 3년상을 허락하고, 서인 출신은 불허함으로써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르도록 한 것이다.
서인에는 농·공·상인이 포함되었다. 서인이 나라의 대상(大喪)을 위하여 근심하고 슬퍼해서 시장을 파했다고 한 데서(『태종실록』 8년 5월 27일), 서인은 저자의 상공인(商工人)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군량을 보충하기 위해 각 품에서 차등 있게 쌀을 내게 했는데, 서인·상공(商工)·천구(賤口: 천민) 가운데 대호(大戶)는 3두(斗), 중호는 2두, 소호는 1두를 내게 했다고 하였다(『태종실록』 9년 12월 6일). 이때의 서인은 상공인에 대비되는 농업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러므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의식에 따라 이들을 신분 개념으로 묶을 경우에, 사농공상은 곧 사(士)와 서인으로 양분된다고 하겠다.
사서인(士庶人)이라는 용례가 많은 것처럼, 서인은 사(士)와 대칭 관계에 있었다. 이는 서인이 양반과도 대칭 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 주는 사례로는 도첩을 줄 때 양반의 자제이면 오승포(五升布) 100필, 서인이면 150필, 천인이면 200필을 바치게 하였다거나(『태조실록』 1년 9월 24일), 동녀(童女)를 뽑아 모을 때에 노비가 없는 양반과 서인의 딸은 일체 뽑지 않도록 하며(『태종실록』 8년 4월 16일), 소나무 베는 것을 금하는 법에 대해 관가(官家)나 양반(兩班)의 집에서는 배를 만들 수 없는 소나무를 쓰게 하고, 서인의 집에서는 잡목(雜木)을 쓰게 하였다고 한 것(『세조실록』 7년 4월 27일) 등을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서인이 사족에 대해서 대칭 관계로 쓰인 많은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서인은 양반과 천인의 중간에 위치하는 신분 계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서인은 농·공·상인과 평민으로서의 국역 담당자를 아우르는 범주의 신분이었다. 사족 혹은 양반과는 대칭 관계에 있으면서 천인과의 중간에 위치함으로써, 서인은 양반과 천인의 중간 계층을 포괄하는 피지배 계층이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유승원, 『조선 초기 신분제 연구』, 을유문화사, 1987.
- 임민혁, 『조선의 예치(禮治)와 왕권』, 민속원, 2012.
- 송준호, 「조선 양반고」, 『한국사학』4, 198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