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복(常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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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이나 문무백관이 평상시 집무 중에 입던 옷.

개설

상복(常服)은 정복(正服)이라고도 한다. 의례의 성격에 따라 입는 옷을 구분하여 제도화한 것은 조선초기인 1426년(세종 8)이다. 이때 예조(禮曹)와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에서 당·송의 제도와 『홍무예제(洪武禮制)』를 참고로 하여 옷을 조복(朝服)·제복(祭服)·공복(公服)·상복(常服)의 4가지로 구분하였다. 이 가운데 일상 집무 중에 입는 옷이 상복이다.

왕은 상복으로 머리에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곤룡포(袞龍袍)를 입었으며, 옥대(玉帶)를 띠었고, 목화(木靴)를 신었다. 왕세자도 왕과 마찬가지로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었는데, 색깔이나 크기 등이 왕과 조금 달랐다. 문무백관은 상복으로 사모(紗帽)를 쓰고 단령(團領)을 입었으며 목화를 신고 대(帶)를 띠었는데, 계급에 따라 대와 흉배(胸背)를 달리하여 구별하였다.

연원 및 변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도 평상 집무 시에 입는 관복(冠服), 즉 상복이 있었지만, 의례의 성격에 따라 입는 옷을 구분하여 제도화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이다. 삼국시대의 관복은 의대(衣帶)와 관식(冠飾)의 색으로 관등(官等)의 상하를 구별하는 일종의 공복 제도였는데, 이것을 상복으로도 입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의 관복은 260년(백제 고이왕 27)에 품계에 따라 관식과 복색(服色)을 구별하여 정하였다. 이듬해에는 왕의 복제를 정하였는데 왕은 금화(金花)를 장식한 오라관(烏羅冠)을 쓰고 자대수포(紫帶袖袍)에 청금고(靑錦袴)를 착용하며, 소피대(素皮帶)를 매고 오혁리(烏革履)를 신도록 하였다. 신라의 의복 제도는 백제보다 약 2세기 반이 뒤진 520년(신라 법흥왕 7)에 자(紫)·비(緋)·청(靑)·황(黃)으로 신분을 구별하는 사색 공복 제도를 정하였다. 648년(신라 진덕여왕 2)에는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 태종(太宗)에게 관복을 청하여 가져왔고, 649년부터는 당나라의 의관제를 따라 시행하였다.

고구려에 대한 기록은 『신당서(新唐書)』에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다. 왕의 옷은 오채복(五彩服), 관은 금테를 두른 백라관(白羅冠), 혁대는 금구(金釦)를 장식한 것을 띠었다고 한다. 또 조신(朝臣)은 금은으로 장식한 청라조우관(靑羅鳥羽冠)을 쓰고 의복은 통수삼(筒袖衫)에 대구고(大口袴)를 입었으며, 백혁대(白革帶)를 띠고 황혁리(黃革履)를 신었다고 한다. 고려는 신라의 제도를 그대로 따르다가 960년(고려 광종 11)에 사색 공복 제도를 정하였다. 왕은 상복으로 오사고모(烏紗高帽)에 담황색포, 자색 비단으로 만든 늑건(勒巾)을 띠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복식은 주로 명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 태조 초부터 복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명나라 사신이 왕의 면복(冕服)과 왕비의 관복 등을 가지고 오자 이를 착용하였다(『태종실록』 3년 10월 27일). 이와 같은 일은 태종·세종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태종은 백관복 제정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대신들로 하여금 연구하여 정리하게 했으나, 백관의 조복·제복·공복·상복 제도가 완성된 것은 결국 세종 때인 1426년(세종 8) 2월이었다. 중국의 복제는 명에서 청으로 그대로 습용되어 우리나라에도 대한제국이 설립될 때까지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 왕의 상복이 처음 들어온 것은 1444년(세종 26) 3월로, 유수강(柳守剛)이 면복과 함께 상복 3습을 받아온 것이었다(『세종실록』 26년 3월 26일). 이때 가져온 상복은 익선관·옥대(玉帶)·곤룡포·답호(褡護)·철릭[帖裡]·화(靴)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여된 품목으로 볼 때 착용법은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 속에 답호와 철릭을 입고 화를 신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곤룡포마다 답호 1벌과 철릭 1벌이 들어 있어서 답호와 철릭을 곤룡포 속에 이의(裏衣)로 입었다. 이 답호와 철릭은 곤룡포를 벗고 마미두면(馬尾頭冕)과 함께 착용하면 왕의 편복(便服)이 되었고, 국난을 당하였을 때는 전립과 함께 착용하여 융복(戎服)으로도 입었다.

문무백관의 상복인 단령은 공복으로도 착용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1품에서 9품까지 품계에 따라 홍색·청색·녹색의 포를 입었는데, 녹사(綠事)·제학(諸學)의 생도(生徒)서리(胥吏)는 단령을, 향리와 별감은 직령(直領)을, 인로(引路)·조례(皁隷)는 청단령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령의 색깔도 여러 차례 변동이 있었으며 규정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

1419년(세종 1) 7월에는 예조에서 조관의 상복으로 마포나 저포에 남색·홍색·흑색을 허용하였고(『세종실록』 1년 7월 17일), 1445년(세종 27)에는 회색 단령을 금하였다(『세종실록』 27년 8월 6일). 1450년(문종 즉위)과 1451년(문종 1)에는 외방의 사신과 수령이 대상일과 담제일에 회색 단령을 착용한 기록이 있다[『문종실록』 즉위 12월 29일 9번째기사]. 태종대에는 황색·백색·회색·옥색의 금제가 있었고, 세종대에는 다시 자색과 다홍색을 추가 금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단령의 색상이 잘 지켜지지 않아 백색·아청색·옥색·압두록색·홍색·유록색 등 다양한 색상이 사용되었다.

1599년(선조 32) 병조가 계품(啓稟)을 올려 허락을 받은 내용을 보면 당상관 이상은 모두 흑단령을 갖추도록 하였다. 또 선조 초에는 조신의 건의에 의하여 아청·초록·목홍을 사용하고, 옥색·치색·단황색은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인조대에는 병자호란 후 관복의 복구가 여의치 않아, 1638년(인조 16) 국혼을 앞두고 옷을 구비할 수 없어서 정사·부사 외에는 모두 흑단령을 착용하기로 하였다. 헌종 가례 때에도 흑단령이 공복으로 등장하였다. 즉 선조 이후의 행례 때에는 흑단령이 공복을 대신하고 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도 왕과 왕세자가 익선관·곤룡포일 때 문무백관은 상복, 즉 흑단령을 착용한다고 나와 있다. 또한 시복 즉 홍단령, 상복 즉 흑단령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745년(영조 21)에는 영의정김재로(金在魯)가 종묘 천신 때 천신관이 상복으로 행례하였다고 나와 있다(『영조실록』 21년 6월 10일). 이는 조신들의 건의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는데, 『경국대전』 의장조에 보면 “당하 3품 이하의 상복은 원래 홍포가 아니라 청록포였으며, 지금의 상복은 흑단령이니 천신관은 홍단령이 아닌 흑단령을 입고 행례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기록되어 있다.

『대전통편(大典通編)』에 따르면, 왕이 곤룡포를 입을 때 조신은 흑단령을 입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전통 속에 1894년(고종 21) 갑신정변의 복제 개혁 때 흑단령이 관복으로 전용되었고, 조신의 대례복으로 사모와 흑단령을 착용하도록 하였다(『고종실록』 31년 12월 16일). 수백 년간 상복으로 착용되던 흑단령이 대례복으로 변한 것이다.

형태

왕의 상복인 곤룡포는 용문의 보(補)를 달아 입어서 생긴 이름으로, 용포(龍袍) 또는 망포(蟒袍, 蟒袍衣)라고도 한다.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서례(序例)」 전하시사복도설(殿下視事服圖設)에 따르면 곤룡포는 대홍단(大紅緞)으로 만드는데, 여름용으로는 대홍사(大紅紗)를 쓰며 포의 전후좌우에 금오조원룡보(金五爪圓龍補)를 단다. 보는 옷의 앞뒤와 좌우 어깨에 황금색으로 반룡(蟠龍)을 직성하여 붙이는데, 보의 용 발톱 수에 따라 왕복·세자복·세손복으로 구분된다.

조선초기 왕은 사조룡포를 착용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친왕(親王)이 오조룡포를 입는다는 것을 알고, 명에서 오조룡포를 사여받아 입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자는 삼조룡포에서 사조룡포로, 세손도 삼조룡포로 바꿔 입었다. 조선초기 태조의 어진을 보면 심청색 곤룡포를 입고 있는데, 깃은 좁고 목이 거의 파이지 않았으며, 상복의 어깨와 등에 부착된 보는 매우 컸고, 익선관의 모정도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영조의 어진에서는 모양이 많이 달라졌다. 『국조속오례의』「서례」에서 제정된 것과 같은 대홍단의 곤룡포를 입었는데, 깃과 소매가 넓어졌고 익선관의 모정도 상당히 높아졌다. 대한제국 때는 왕의 복색이 다홍색에서 황색으로 바뀌었다.

왕세자의 상복은 『국조속오례의』「서례」 왕세자 서연복(書筵服) 제도에서 나와 있다. 왕세자의 익선관은 모라(毛羅)로 싸고 양대각(兩大角) 뒤에 양소각(兩小角)을 첨부하여 향상시켰고, 곤룡포는 흑단(黑緞, 여름에는 黑紗)으로 하였으며, 포 전후와 좌우 어깨에 금색의 사조원룡보(四爪圓龍補)를 달았다. 옥대의 옥은 부조옥(不雕玉)이었으며, 흑단으로 싸고 금색으로 그렸다. 화는 흑궤자피(黑麂子皮)로 만들었는데, 여름에는 흑칠피(黑漆皮)를 사용하였다.

문무백관의 상복의 형태에 대해서는 『경국대전』「예전(禮典)」 의장조(儀章條)에 잘 나와 있다. 1품관은 사모(紗帽)를 쓰고, 관자(貫子)와 입영(笠纓)에는 금옥(金玉)을 사용하였으며, 이엄(耳掩)에는 단(緞)과 초피(貂皮)를 사용했다. 직물은 사(紗)·나(羅)·능(綾)·단(緞)을 사용하고, 흉배는 대군(大君)은 기린(麒麟), 왕자군은 백택(白澤), 문관은 공작(孔雀), 무관은 호표(虎豹)를 수놓았다. 대(帶)는 조복·제복·공복과 같이 서대(犀帶)를 띠었고, 신은 협금화(挾金靴)를 신었다.

2품관은 1품관과 같이 사모를 쓰고, 관자와 입영에는 금옥을 사용하였으며, 입식(笠飾)은 은으로 하고, 이엄은 단과 초피를 사용했다. 직물은 1품관과 같이 사·라·단을 사용하고 흉배는 문관은 운안(雲雁), 무관은 호표(虎豹)를 수놓았다[대사헌은 해치]. 띠는 조복·제복과 같이 정2품은 삽금대(鈒金帶), 종2품은 소금대(素金帶)를 띠었다. 신은 1품관과 같은 협금화를 신었다.

당상관의 관자와 입영은 금옥을 사용하였고, 입식은 은을, 이엄은 단과 초피를 사용했다. 당하관 3품에서 9품까지는 이엄에 초와 서피(鼠皮)를 사용했다. 흉배는 문관은 백한(白鷳), 무관은 웅비(雄飛)를 수놓았고, 띠는 정3품은 삽은대(鈒銀帶), 종3품은 소은대(素銀帶)를 띠었다. 신은 당상관은 협금화를 신었다. 4품관은 사모를 쓰고, 직물에 대한 규정은 없으며, 띠는 소은대를 띠었다. 5·6품관 역시 사모를 썼는데, 직물에 대한 규정은 없었으며, 조복·제복·공복과 같이 흑각대(黑角帶)를 띠었다. 7·8·9품관도 사모를 쓰고 흑각대를 띠었다.

향리는 흑죽방립(黑竹方笠)을 쓰고 직령(直領)을 입으며 띠는 조아(條兒)를 띠고 피혜(皮鞋)를 신었으며, 별감은 주황 초립을 쓰고 직령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734년(영조 10)에는 문관 당상은 운학흉배, 당하는 백한흉배를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속대전(續大典)』에 실려 대한제국 말 고종대까지 시행되었다. 고종대에 와서는 흉배 제도가 논의되어 『오례편고(五禮便攷)』 의장조에서 정한 대로 문관 당상관은 쌍학, 당하관은 단학, 무관 당상관은 쌍호, 당하관은 단호로 하였다. 민속자료로 지정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형 흥완군(興完君)이정응(李晸應)의 상복에는 쌍학흉배가 부착되어 있고, 흥선대원군은 1895년(고종 32)부터 자신의 기린흉배를 거북이 흉배로 바꾸어 사용하였다.

용도

왕의 상복인 익선관과 곤룡포는 왕이 일상 시무를 볼 때 입는 시무복이다. 또한 가례 시에는 동뢰연(同牢宴)에서 면복으로 행례한 후 갈아입는 법복에 속한다. 문무백관의 단령은 길례(吉禮)·가례(嘉禮)·흉례(凶禮)·빈례(賓禮) 시에 착용하는 예복이었다. 길례 시에는 길복(吉服)·담복(禫服)으로, 능에 참배할 때, 능을 옮길 때, 속절(俗節)의 제사 및 고유제(告由祭)를 지낼 때, 친제(親祭)나 봄가을의 전배(展拜), 행릉의 등에 착용하였다.

가례의 용도로는 왕실 의식·왕실 경연·세자 책봉례·세자 입학 의례·왕세자의 혼인례·선물·어가수행·서정(庶政) 참예·사법·법제·입시 등에 착용하였다. 흉례 시 착용한 단령은 상복(喪服)으로 입거나, 염습(殮襲)한 뒤, 천장(遷葬) 시, 상제 전, 졸곡 후 소복, 발인반차, 최복(衰服) 등으로 입었다. 빈례에서는 왕의 하사품·선물·영접·외교 등의 용도로 단령을 착용하였다.

참고문헌

  • 유송옥, 『한국복식사』, 수학사, 1998.
  • 유희경, 『한국복식문화사』, 교문사, 2001.
  • 최은수, 『조선시대 백관의 단령』, 민속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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