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령(團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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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이하 왕세자, 종친, 문무백관 등이 입었던 둥근 깃의 관복.

개설

단령은 서역에서 유래된 옷인데 중국에서는 북조(北朝) 시대에 착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우리나라에는 7세기경에 전래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광범위하게 착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말 이후로, 1381년(고려 우왕 13)에 명나라 제도를 수용한 뒤 조선시대에도 변함없이 관복으로 착용하게 되었다.

『대명회전(大明會典)』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명나라의 관리들은 잡색(雜色) 단령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조선에서도 관리들의 단령 색상에는 제한이 없었다. 단지 조정의 관리들이 옅은 색의 단령을 입었기 때문에 조정의 위용을 갖추기 위하여 짙은 색의 단령을 입도록 하였다.

그러나 세종대에 이르러서는 관리들의 단령에 색상의 규정이 없어서 혼란스럽게 되자 이를 정비하기 위하여 특별히 대소의례에 사용하는 단령에는 흑색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예복용 흑단령과 집무용 잡색 단령으로 구분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단종대에는 모든 단령에 흉배를 달도록 하였는데 세조대에 이르러서는 흑단령에만 흉배를 다는 관행이 생겼으며 그런 관행은 제도로 정착되어 왕조의 끝까지 지속되었다. 집무복으로 사용하는 잡색 단령은 점차 홍색 단령으로 단순화되어 갔지만 명종대 이후로는 당상관의 담홍색 단령과 당하관의 심홍색 단령으로 분화되었다.

관복으로 사용된 단령은 조선초기에 상복(常服)이나 시복(時服)이라는 명칭으로 구분 없이 사용되었으나 성종대 말 이후부터는 흑단령은 시복이라고 지칭하였고 집무복인 홍단령은 상복이라고 지칭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난 17세기 초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기록에 근거하여 흑단령을 상복으로 칭하게 되면서 홍단령은 시복으로 그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조선말기 단령 제도가 사라질 때까지 변경된 명칭이 사용되었다.

단령의 형태는 곤룡포의 형태와도 같았는데 시대에 따라 세부적인 변화가 있었다. 깃은 넓어지고 깊게 파였으며 소매 역시 좁은 통수에서 두리소매[廣袖]로 변화되었다. 우임으로 깊게 여미던 앞여밈은 점차 여밈이 얕아졌다. 옆트임 선에 달렸던 커다란 무(武)가 초기에는 허리 아래에 주름 잡혀 늘어졌던 것이 임진왜란 이후 점차 등 뒤로 돌아가서 뒷길에 꿰매어 붙여졌다.

연원 및 변천

1381년(고려 우왕 7)에 명나라 제도를 따라 1품에서 9품까지 사모에 단령을 입고 품대를 사용하도록 하면서 조선시대에도 변함없이 관복으로 착용하게 되었다. 단령에는 일반적으로 사모라는 관모를 쓰고 허리에 각자의 품계에 따른 품대를 두르고 흑화를 신었다. 그러나 조선전기에는 관직이 없는 사람들은 예복으로 단령에 입자(笠子), 즉 갓을 쓰기도 하였다.

1419년(세종 1), 서민의 단령의(團領衣)를 금하면서 단령은 명실상부한 관리들의 옷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단령의 색상은 『대명회전(大明會典)』에도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명나라에서도 관복으로 잡색 단령을 사용하게 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조선에서도 관리들의 단령에 본래 색상의 제한이 없었다. 태종대에는 조정의 관리들이 옅은 색의 단령을 입었기 때문에 조정의 위용(威容)을 위하여 짙은 색의 단령을 입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세종대에 예복용 흑단령과 집무용 잡색 단령으로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1446년(세종 28)에 조복(朝服)이나 공복(公服)을 입지 않는 조참(朝參)이나 조계(朝啓), 동궁 조참 등에 상복을 착용하되, 중국의 제도를 따라 검게 물들인 조의(朝衣)를 입도록 하였다. 당상관 이상은 단자(段子)와 사(紗)·라(羅) 등을 허용하고 3품 이하는 본국의 옷감을 검게 염색하여 착용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8년 1월 23일). 곧 상복 중 의례복으로 흑단령을 입도록 한 것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상창, 조참, 조계에 흑의(黑衣)를 입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단령에는 품계에 따라 흉배를 달았는데 그 제도는 1454년(단종 2) 12월부터 시작되었다. 12월 1일에는 종친의 단령에 흉배를 달게 하고(『단종실록』 2년 12월 1일), 이어 10일에는 당상관 이상의 문무관 상복에 단령을 부착하도록 하였다. 『청파극담(靑坡劇談)』에 의하면, 세조대 이후에는 조회나 예연에만 흉배를 부착하는 관행이 생겼다고 하였다. 따라서 흑단령에만 흉배를 부착한 것이고 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흑단령 외의 잡색 단령은 점차 색상이 담홍색, 녹색 등으로 색상이 단순화되어 갔으며 중종대 이후에는 홍색으로 정착되면서 당상관은 담홍색 단령을, 그리고 당하관은 심홍색 단령을 착용하게 되었다.

단령 관복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다. 조선초에는 모든 색상의 단령을 상복, 또는 시복으로 구별 없이 사용하였으나 세종대 이후 상참, 조참과 같은 의례에 흑단령을 착용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색상의 단령 관복과는 구별하여 예복으로 지칭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종대의 『국조오례의』에는 흑단령이 상복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비로소 휘(麾)를 관장하는 협률랑(協律郞)이 입는 흑단령을 시복(時服)이라고 칭한 경우가 확인된다. 중종대에 이르러서는 예복인 흑단령을 분명하게 시복이라고 칭하였으며 집무복으로 착용된 홍색 계열의 단령은 상복이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이 구분이 모호해짐에 따라 1610년(광해군 2) 예조 판서였던 이정구(李廷龜)는 『국조오례의』에 흑단령을 입어야 한다고 한 의주에 흑단령이 상복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들어 흑단령을 상복으로 지칭하기에 이르렀고 따라서 홍단령은 시복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9월 8일).

단령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세부적인 변화가 있었다. 깃은 넓어지고 깊게 내려갔으며 소매 역시 통수에서 두리소매[廣袖]로 변화되었다. 우임으로 깊게 여미던 앞여밈은 점차 여밈이 얕아졌으며 옆트임 선에 달렸던 커다란 무는 초기에 허리 아래에 주름 잡혀 늘어졌던 것이 임진왜란 이후 점차 등 뒤로 돌아가서 결국 뒷길에 꿰매어 붙여지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형태

단령은 시대에 따라 깃 너비와 깃 깊이, 소매의 길이와 너비, 겨드랑점에서 무 시작점까지의 옆선 길이, 무의 주름양식, 옷길이, 전단후장 양식 등이 시대에 따라 변화되었다.

단령은 둥근 깃에 우임으로 깊게 여며 입었던 긴 옷으로, 좌우 옆선에 트임이 있고 그 트임에는 옷감 한 폭 정도의 커다란 무(武)가 달렸다. 그리고 앞여밈의 정도가 점차 얕아지면서 오른쪽 겨드랑이부위에 달려 있던 고름이 점차 앞 중심 쪽으로 이동되었다. 고름도 너비 2㎝ 정도에 길이 30㎝ 정도의 작은 끈이었으나, 후기로 가면서 크고 긴 형태로 변화되어 갔다. 고름을 다는 방식도 초기에는 직접 부착형과 간접 부착형 등으로 다양하였으나, 후기로 가면서 직접 부착형만 사용되는 등 단순화 되었다. 또한 초기의 깃은 좁고 목에 가깝게 달렸으나, 후대로 가면서 깃 너비가 넓어지고 깊이도 깊어졌다. 무는 조선전기부터 말기까지 다중 안주름형에서 대소 안팎주름형, 밖주름형, 뻣침형, 단추고정형, 상침고정형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단령의 무 양식은 단령 유물의 연대를 추정하는 단서가 된다.

조선초기의 단령 길이는 대체로 발목에 이를 정도로 길었는데 16세기 후기에는 중국 사신들이 입고 온 단령의 영향으로 길이가 다소 짧아졌다. 또한 16세기의 단령은 앞길이가 뒷길이보다 짧은 전단후장형(前短後長形)인 것이 특징인데, 이는 문관과 무관의 옷 길이에 차이를 두었던 명나라 제도를 따른 것이었다. 16세기의 단령 유물에서 전단후장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단령의 소매 길이는 손끝에서 다시 팔꿈치에 이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길어서 손이 보이지 않았는데, 후대로 가면서 점차 소매 길이는 짧아졌다. 소매통은 전기에는 30~40㎝ 정도로 좁은 것이었으나 점차 넓어져서 17세기 초기에는 45㎝ 전후, 17세기 중·후기 이후에는 60㎝가 넘는 두리소매로 변화하였다. 고종대에는 의제개혁의 일환으로 좁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단령의 구성법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변화되었다. 초기에는 주로 홑단령에 답호(褡穫)와 철릭을 받침옷으로 입었으나, 17세기 전기 이후 답호가 직령(直領)으로 대체되면서 단령의 안감으로 정착됨에 따라 단령과 직령이 안팎을 이루는 겹단령으로 변화되었고 답호 안에 입었던 철릭은 뒤트임의 창의(氅衣)로 대체되었다.

용도

세종대에 서민의 단령의(團領衣)를 금하면서 단령은 관리들의 옷으로 정착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신랑의 초례청 예복으로 착용되는 습속이 있었지만 조선전기에는 혼례에는 물론, 제사 등의 가례(家禮)에 흑단령을 착용하였다. 16세기 후기의 김성일(金誠一)의 『학봉집(鶴峯集)』에는 당시 관직이 있는 자들은 집안의 제사에 흑단령을 착용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서인(庶人)들이 혼례 때 관대를 입는 것을 규제하는 규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례적으로는 혼례 때 신랑이 단령을 입는 경우가 흔하였다. 신랑이 입는 옷은 흔히 사모관대라고 하였는데, 혼례 때는 신분이나 품계에 관계없이 최고의 옷을 입을 수 있는 이른바 섭성(攝盛) 풍속에 의하여 1품의 복식 착용이 허용되었다. 대체로 흉배가 장식된 자적단령이나 흑단령을 사용하였다. 이덕무(李德懋)의 「김신부부전(金申夫婦傳)」에도 관직이 없는 노총각 신랑이 오모(烏帽)에 섬사포(閃紗袍), 반서대(斑犀帶), 경화(麖靴)를 갖추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상류층에서는 단령을 그리 어렵지 않게 장만하여 입을 수 있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서민들은 개별적으로 장만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마을마다 공동으로 입을 수 있는 혼례복을 마련해 두고 빌려 입는 경우가 흔하였으며 세물전(貰物廛)이나 수모(手母) 또는 장파(粧婆)라고 하는 부인에게서 빌려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대명회전(大明會典)』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청파극담(靑坡劇談)』
  • 『학봉집(鶴峯集)』
  • 박성실, 「서울 상암동 출토 全州李氏 密昌君 服飾 考察」, 『韓國服飾』22, 2004
  • 이은주, 「조선시대 백관의 時服과 常服 제도 변천」, 『服飾』55(6), 2005.
  • 이은주·조효숙·하명은, 『17세기의 무관옷 이야기』, 민속원,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