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례(賓禮)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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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빈례 |
한글표제 | 빈례 |
한자표제 | 賓禮 |
상위어 | 오례(五禮) |
하위어 | 관소연(館所宴), 연인국사의(宴隣國使儀) |
관련어 | 외국사신(外國使臣) |
분야 | 왕실/왕실의례/빈례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지두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빈례(賓禮) |
오례(五禮)의 하나로서 외국 사신(使臣)을 접대하는 예.
개설
고려의 빈례는 원래 왕과 제후와의 만남을 위한 예제이다. 고려왕조에서는 국제 관계의 예제가 반영되었다. 그런데 빈례 항목은 매우 빈약해 총 5개이며, 그 중에서 3개 항이 중국명나라와의 관계이다. 빈례의 특징은 명나라를 제외한 북조(北朝)와의 의전에서 고려 왕이 사신과 마주 대할 때 남면(南面)을 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고려는 자신의 독자적 위치를 분명히 했다.
조선시대에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을 하였으며, 외국 사신으로는 조정(朝廷) 사신과 인국(隣國) 사신이 있다. 조정으로는 명나라·청나라가 있고, 인국으로는 여진·일본·유구 등이 있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사대명분론에 입각해 운영하고, 그밖에 왜(倭) 등과는 교린관계로 처리하였다. 조선전기 태종대에 이르면 교린국 사신에 대한 접대 규정들이 정비되기 시작하다가, 세종대 이후로 교린국 사신의 위차 규정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나타나고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청나라 사신을 조정 사신으로 대접하지만, 조선중화주의에 입각하여 이들을 북사(北使)라고 기록할 정도로 폄하하고 있었다. 또한 정묘호란·병자호란에 직계가 피해를 당하거나 또는 산림의 경우 청나라 사신이 오면 벼슬을 사직하여 이들에 대한 접대를 피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빈례의 종류로는 사대교린 정책에 따라 조정 사신을 접대하는 의례와 인국 사신을 접대하는 의례가 있다. 연조정사의(宴朝廷使儀)란 왕이 중국 조정의 사신을 맞아 연회(宴會)를 베푸는 의식(儀式)이다. 왕세자 및 종친 혹은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에서도 베풀며, 이때는 영접도감(迎接都監)에서 주로 담당하여 의례(儀禮)를 행하였다. 왕세자가 조정의 사신을 대접하는 왕세자연조정사의(王世子宴朝廷使儀)와 종친(宗親)이 조정의 사신을 대접하는 종친연조정사의(宗親宴朝廷使儀)가 있다.
수인국서폐의(受隣國書幣儀)란 일본이나 유구국 등 이웃한 나라와 사대교린을 위해 사신을 보내어 서계(書契)와 폐물(幣物)을 주고받는 의례이다. 『국조오례의』에 ‘수인국서폐의’라는 빈례 의식이 규정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여러 섬의 왜인(倭人)이나 야인(野人)의 추장(酋長)이 직접 조공하거나, 사인(使人)이 서폐(書幣)를 바치면 백관(百官)의 조현(朝見)에 따라 평상시와 같이 한다. 사자(使者)가 국경(國境)에 이르면 사자를 보내어 영접하고 위로하며, 근교(近郊)에 이르면 또 사자를 보내어 위로하고 연회를 베푼다.
연인국사의(宴隣國使儀)란 일본이나 유구국 등의 인국 외교사신(外交使臣) 등에 대하여 연회를 베푸는 의식이고, 예조연인국사의(禮曹宴隣國使儀)란 예조(禮曹)에서 인국의 사신을 대접하는 의식이다.
변천
빈례를 통해 명과 청이 교체되면서 중국 사신에 대한 접대가 변할 뿐만 아니라 교린국에 대한 접대가 변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중국 사신의 접대는 영접도감에서 주관하였다. 영접도감은 다른 도감처럼 도감이 운영되는 동안 운영되었던 모든 기록을 등록하여 정리하고, 이를 다시 의궤로 묶어 보관하였다. 『영접도감의궤(迎接都監儀軌)』는 사신을 접대할 때 필요한 물품 조달 및 인원 동원에 관한 것과 사제(賜祭)나 책봉(冊封) 등 의례의 절차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의궤가 인조대 이후 작성되지 않았다는 점은 대청 인식의 중요한 반증이라 할 수 있다.
인조대부터 작성되는 칙사 관련 등록(謄錄) 기록이 의궤를 대신하였으며, 외교 관련 기록은 정조대에 『동문휘고(同文彙考)』 편찬으로 이어졌다. 조선의 대청 인식은 외교 형식면에서는 전형적인 조공 책봉 체제에 입각하였지만 내면적으로는 반청 의식과 이에서 발전된 조선중화사상이 엄연히 존재하였음을 반증한다.
중국 사신은 사신이 지니고 오는 문서의 종류에 의해 구분된다. 황제의 명의로 발행된 문서는 제(制), 조(詔), 고(誥), 칙(勅) 등이 있다. 제는 만조백관을 대상으로 발행되는 문서이고, 조는 천하에 포고하는 것으로 대부분 황제가 사망하거나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는 경우, 또는 청년 황제가 친정(親政)하는 경우에 다스림의 대강과 강령을 밝히는 문서이다. 고는 5품 이상 관원에게 작위를 내려주거나 임명할 경우에 사용되는 것으로, 고의 일반적인 문서 형식을 고명이라 한다. 칙은 칙유(勅諭)·칙명(勅命)·칙서(勅書)로 구분된다. 황제가 특정한 문제에 대해 특정 지역의 인민에게 내려주는 유시(諭示)를 칙유라 하고, 6품 이하 관원을 임명할 때 사용되는 문서를 칙명이라 하며, 중요 관원의 직책·권한·규정 등을 밝힌 것을 칙서라고 한다.
조서를 지참하면 조사(詔使), 칙서를 지참하면 칙사(勅使)라고 하지만, 해당 국가를 기준으로 명나라 사신은 ‘명사(明使)’·‘천사(天使)’ 등으로, 청나라 사신은 ‘청사(淸使)’·‘칙사’ 등으로 불러 차별을 두었다. 단순한 호칭의 차이가 아닌 대중국 인식의 차이, 대중국 관계의 차이를 반영한 것이다.
조선에 오는 사신은 중국의 중앙 정계에서 일정한 권력층에 속하는 인물이 대부분이었다. 환관정치가 행해졌던 명대에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사례감(司禮監)이나 태감(太監)의 직책을 지녔던 인물이 사신으로 왔다. 청대에는 팔기(八旗) 중심으로 사신이 파견되었다.
사신의 영접은 조정의 중대사였다. 사신이 오면 의주에서 최초로 원접사(遠接使)가 영접하고, 의주에서 수도에 이르는 요지에서는 선위사(宣慰使)가 접대하였다. 그리고 수도에 도착한 이후 떠나기까지는 관반사(館伴使)·접반사(接伴使)·반행사(伴行使) 및 반송사(伴送使) 등이 영접을 담당하였다. 조선초기에 영접 관직을 겸임하였던 고위 관원들 중에 종친이나 왕의 측근들이 많이 있었던 것은 대명 외교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음과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측근 세력들에게 명예로운 임시 관직을 수여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조선후기에는 산림이나 정묘호란·병자호란에 피해를 당한 직계자들은 청나라 사신이 오면 청의 사신을 접대하지 않기 위해 벼슬을 사직하기도 했다.
다음으로 인국 사신의 접대는 태조·정종대의 경우 교린국에 대한 접대 규정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군사적 위협이 우려되는 야인과 서일본 지역 호족의 사신이 우대되었다. 태종대에 이르면 교린국 사신에 대한 접대 규정이 정비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관료제 정비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1431년(세종 13) 일본과 유구의 사신은 서반 3품, 야인의 사신은 동반 3품~5품으로 위차가 정해졌다.
『세종실록』 「오례」가 마련되는 단계에 이르면 일본과 유구의 국왕사(國王使)는 종2품, 일본 호족의 사신은 종5품, 야인의 사신은 종3품~6품으로 정해진다. 이때 처음으로 야인 사신의 위치가 일본이나 유구에 비해 낮아졌다. 그 이유는 4군 6진의 개척에 따른 국방에 대한 자신감과 왕실의 예인 오례가 편찬될 정도로 성리학이 발달함에 따라 대등한 국가의 사신과 부족 단위의 사신을 동등하게 대우할 수 없다는 명분론이 작용한 것이었다. 『세종실록』 「오례」에 나타나고 있는 교린국 사신의 위차 규정은 성종대 편찬된 『국조오례의』에 그대로 반영된다.
의의
조선전기에는 명나라와 사대명분론에 입각해 대명 외교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반면에 조선후기에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청의 사신은 북사(北使)라고 할 정도로 정식 조정 사신으로 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편전에서 만나는 정도였다. 인국 사신은 일본이 대표적이다. 대마도를 통해 일본과 거래하면서 동래의 왜관에서 일본 사신을 접대하였기 때문에 연인국사의도 조선전기에 행해지고 이후로는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
유구국도 일본과 같은 인국 사신으로서 사자가 국경에 이르면 사자를 보내어 영접 위로하고, 근교에 이르면 또 사자를 보내어 위로하고 연회를 베풀었다. 또한 연인국사의와는 달리 인국 사신은 왕에게 사배(四拜)를 하는 절차가 있으며, 왕이 중문(中門)까지 전송하는 절차가 없다. 만약 여러 섬[島]의 왜인과 여러 위(衛)의 야인 추장의 사인이라면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남랑(南廊)에서 접대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오례」와 『국조오례의』의 빈례는 대동소이하며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 추가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 『대전통편(大全通編)』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빈례총람(賓禮總覽)』
- 『칙사등록(勅使謄錄)』
- 『칙사시명항의주등록(勅使時名項儀註謄錄)』
- 『칙사의주등록(勅使儀註謄錄)』
- 『문헌비고(文獻備考)』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