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연조정사의(王世子宴朝廷使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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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가 중국 사신을 위해 연향하는 의식.

개설

중국 황제의 조서나 칙서를 가져온 사신에게 왕세자가 베푸는 연향이다. 왕이 베푸는 연향인 연조정사의(宴朝廷使儀)와 같이 의례 앞부분에 다례(茶禮)를 포함한다. 종친이 베푸는 종친연조정사의(宗親宴朝廷使儀)에서는 다례가 생략되어 차등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술을 7잔까지 돌리는 점은 세 의례가 동일하였다. 사신은 태평관(太平館)에서 연향을 받았다. 왕세자가 태평관에 도착하면 의례를 시작하였다. 조서나 칙서를 받는 영조서의(迎詔書儀)나 영칙서의(迎勅書儀)가 의례적 측면이 강한 것에 비해 왕세자연조정사의(王世子宴朝廷使儀)는 연향의 성격이 강한 의례로서 술과 음식을 나누는 절차가 추가되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에 중국과의 외교는 사대(事大)의 예로 행해졌다. 이는 교린(交隣)의 예로 행하는 일본·유구국(琉球國) 등 이웃 나라[隣國]와의 외교와 그 위격이 구분된 것이다. 중국 사신을 위한 연향은 왕·왕세자·종친이 각각 주체가 되어 베풀었는데, 이 점은 조선시대 내내 동일하였다. 연향의 주체에 따라 자리 배치가 달랐으며 담당 관원의 위격도 차이가 있었다. 시기별로 담당 관서와 담당 관원의 명칭이 바뀌는 변화가 보이며 의례의 큰 틀에서는 시기별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1402년(태종 2)에 예조(禮曹)가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와 함께 사신연의 음악을 제정할 때 왕세자연조정사의에 관한 내용은 없으나 왕이 사신을 위해 베푸는 연향과 의정부(議政府)에서 사신을 위해 베푸는 연향에 쓰이는 음악 등을 정한 기록이 있다(『태종실록』 2년 6월 5일).

절차 및 내용

사신의 자리는 태평관의 정청(正廳) 동벽에 서향하여 설치하고 왕세자의 자리는 서벽에 남쪽 가까이에 동향하여 설치한다. 이는 왕이 주체가 되어 행하는 연조정사의의 좌석 배치에서 정사(正使)의 자리는 동벽에 서향하여 설치하고 왕의 자리는 서벽에 동향하여 설치하는 것과 비교하면 왕세자의 자리를 보다 남쪽 가까이로 물려 사신과 일렬을 이루지 않도록 조정했음을 알 수 있다. 의례는 왕세자와 사신이 읍례(揖禮)를 하는 것으로 시작하였고, 진다(進茶), 제1잔(盞), 진찬탁(進饌卓), 진화(進花), 제2잔, 진소선(進小膳), 제3잔, 진탕(進湯), 제4잔, 진탕, 제5잔, 진탕, 제6잔, 진탕, 제7잔, 진탕, 진대선(進大膳), 읍례의 순으로 행한다.

진다는 차를 올리는 순서로서 술을 돌리기에 앞서 행한다. 차는 과일과 함께 내며 다례를 마친 후에는 전악(典樂)이 노래를 부르는 가자(歌者)와 금(琴), 슬(瑟)을 연주할 악인을 이끌고 들어와 월대 위에 앉아 음악을 연주한다. 제1잔을 올릴 때 음식상을 내며 꽃을 나눈다. 제2잔을 올릴 때 소선을 올리며, 제3잔부터 제7잔 사이에는 탕을, 제7잔 이후에는 대선을 올리는 절차로 의례를 행한다. 술은 왕세자가 사신에게 먼저 올리고 사신이 왕세자에게 이어 올리는 순서로 행한다. 술 올리는 일을 담당한 관원은 사준부제조(司尊副提調)이며 음식은 사옹부제조(司饔副提調)가 담당하여 올렸다. 제2잔과 제3잔 사이에 올리는 소선은 고기를 베어 올리는 방식이지만 제7잔에 올리는 대선의 고기는 베지 않고 올린다. 매 잔을 올릴 때에는 음악을 연주한다. 제7잔까지 올리면 의례를 마치고 왕세자가 나간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통문관지(通文館志)』
  • 『춘관통고(春官通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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