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봉(冊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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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서양의 만국공법이 도입되기 이전, 중국의 황제가 조선을 비롯한 주변 여러 나라의 군주를 추인(追認)하는 제도.

개설

책봉은 임금이 왕세자, 왕세손, 왕후, 비빈(妃嬪), 부마(駙馬), 공신(功臣) 등을 봉작(封爵)하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중국 황제에 의한 주변 국가의 군주 임명을 의미한다. 책봉은 한대 이후에 중국이 중심이었던 동아시아 세계질서 속에서 나타났는데,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 사이에 대외 정책의 기본 방침이 되어, 조선을 포함한 중국 주변의 모든 나라에게 국제 관계의 규범으로 작동하였다.

내용 및 특징

책봉은 조공과 떼어 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책봉과 조공은 근대 이전 동아시아의 독특한 외교 형태였다. 중국과 주변국의 책봉과 조공의 관계는 약소국인 주변국이 자국의 안전을 위하여 중국과의 공식적인 교류를 통하여 중국의 갖가지 형태의 침략을 사전에 방지하려는 외교정책이었다. 중국은 주변국에 대하여 종속 관계 등을 맺고 통제하는 기미정책(羈縻政策)을 통하여 상호불가침의 평화공존 관계를 수립하였다.

주변국의 사신이 중국의 조정에 들어가 공물을 바치는 조빙공헌(朝聘貢獻)과 중국의 황제에 의한 답례인 회사(回賜)는 책봉과 조공 관계에 정치적 의미뿐 아니라 경제·문화적 측면도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책봉을 받는다는 것은 중국의 황제가 주재하는 동아시아 외교 체제로의 편입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국제적 승인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이전 만주·몽골·티베트·베트남 및 중앙아시아의 모든 나라는 빠짐없이 중국에 조공하였다. 고대의 일본도 중국에 조공하였으며, 19세기에 들어 영국·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가 중국에 통상을 요구할 때에도 이 형식을 취해야만 하였다.

조선의 대중국 외교 관계도 책봉과 조공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주변국 사이에 제도화되어 있던 국제 관계의 보편적인 외교 규범을 지키면서 조선이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외교 체제 속에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

변천

한국사에서 책봉이 나타난 계기는 후한건무 20년(44)에 동이(東夷) 한국인이 낙랑(樂浪)에 공물을 바친 것이 시작이었다. 후한의 광무제가 작위와 인수(印綬)를 수여하면서 한(韓)의 군장(君長)을 책봉하였고, 양국의 제도적 관계는 ‘책봉과 조공’이라는 틀로 맺어졌다. 이 시기의 책봉은 지속적이지 않았으며, 전형적 책봉조공 관계의 특징적 내용은 나타나지 않는다.

위진남북조 시기에 기본적인 얼개가 확립되었으며, 당~원을 거쳐 명·청시대에 들어와 보다 강화된 책봉과 조공 관계가 성립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조공, 회사, 봉전(封典), 칭신(稱臣), 연호와 역(曆)의 사용을 특징으로 하는 지속적인 관계가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청의 황제가 조선의 임금을 인정해 주는 제도라고 할 수 있는 책봉은 1894년 청이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함으로써 끝을 맺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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