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정책(羈縻政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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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대 왕조가 다른 민족에게 취한 간접 통치 정책, 또는 조선의 외교정책.

개설

본래 기미(羈縻)란 중국의 이적(夷狄)에 대한 통제·회유책으로 주변 국가의 왕이나 세력을 중국에 조공하게 하여 관직을 수여하는 대신, 그에 상응한 경제적 보상을 하는 것을 말하였다. 중국은 기미정책(羈縻政策)을 통하여 천자로서의 권위와 변방의 안정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조선시대 명나라의 여진족에 대한 방식도 기미정책을 계승한 것이었다.

중화(中華)가 이적을 대하는 방식이 기미(羈縻)이고, 중국 내부의 제후나 책봉국 간의 통교하는 방식을 교린(交隣)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기미의 경우에도 교린의 정신을 이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교린을 표방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교린국에 대한 교류 방식으로는 적례교린(敵禮交隣)과 기미교린(羈縻交隣)으로 나눌 수 있다.

조선 조정은 일본·유구·여진·동남아 국가와 교린 관계에 있었지만 그 관계를 광의의 ‘기미교린(羈縻交隣)’으로 인식하였다. 일본에 대해서도 적례국(敵禮國)으로서 대등하다는 인식도 있었지만,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하여 야만시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막부 장군의 사절인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에 대한 조선 측의 접대 의식도 결코 대등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 정부는 일본국왕사를 항상 조정의 조하(朝賀) 의식에 참가시켰으며, 세종대까지는 조회(朝會)할 때 수직인(受職人)인 여진족 추장과 같이 3품 반차(班次)에 배열하였다. 유구국왕사도 마찬가지였다.

내용

조선 조정은 중국의 외이(外夷)에 대한 기미정책을 본받아 일본의 지방 세력 및 여진족에게 적용하였다. 즉, 조선과 교역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수직제도(授職制度)와 도서(圖書) 등을 통하여 경제적 특권을 주면서 그들로 하여금 조정에 내조(來朝)하도록 하였다. 조선 조정은 그들을 정치적으로 복종시켜 왕의 권위를 세웠고 ‘조선적 국제 질서’에 편입시킴으로써 변방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조선초기의 대일 정책을 분석해 보면 중국한대(漢代)의 대외 정책을 모범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한나라 때에 개발된 외교 정책론은 화친론·기미론(羈縻論)·정벌론으로 나눌 수 있다. 그 가운데 기미론은 특히 후한(後漢)의 주된 외교정책으로 채택되었다. 기미란 말의 굴레와 소의 고삐를 가리키는데, 견제하고 조정한다는 의미였다. 기미론의 핵심은 “견제하면서 단절하지 않을 따름이다[羈縻不絶而已]”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었다.

여기서 ‘부절(不絶)’이란 국교를 유지하면서 사절을 교환한다는 뜻이고, ‘이이(而已)’란 정복이나 지배와 같은 더 이상의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조선초기나 임진왜란 이후 국교 재개기에 조정 논의를 보면, 한대의 흉노에 대한 정책을 주로 인용하며 기미론을 주장하거나 정당화하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막부 장군을 일본 국왕으로 인정하여 대등 의례를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한대의 외이기미책(外夷羈縻策)을 적용하는 넓은 의미의 기미교린 대상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일본에 대한 기미정책의 실례를 살펴보면 그 특징을 잘 알 수 있다. 조선초기 대일 정책의 기본은 남쪽 변경의 평화를 확보하는 것으로 바로 왜구 대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왜구를 평화적 통교자로 전환하는 일이었다. 왜구의 침략이 근절되지 않자 1419년(세종 1) 왜구 근거지인 대마도에 대한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와 같은 경과를 거쳐 15세기 중엽에 확립된 대일 통교 체제는 막부와는 적례교린(敵禮交隣), 대마도 등 여타 세력에 대해서는 기미교린(羈縻交隣)이라는 중층적인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특히 대마도에는 여러 교역상 특권을 주면서 일본의 각종 통교자들을 통제하도록 하는 한편, 조선 중심의 국제 질서 체계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이 시기 조선 정부가 대마도에 대해 시행한 방식은 기미정책의 전형적인 보기라고 할 수 있다.

대마도주는 조선의 수직인이면서 조선을 외부에서 지키는 번병(藩屛)으로서 왜구를 방비하는 구실을 자임하였다. 대신 대마도주는 세견선·세사미두·문인(文引) 발행권 등 여러 경제적 특권을 보장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도내에서의 정치적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전형적인 외이기미책으로서 일종의 이이제이책(以夷制夷策)이라고도 할 수 있다.

변천

15세기 조선의 대외 정책은 화이관에 바탕을 두면서도 현실성과 융통성이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 사대와 교린 모두 국가의 안전을 위한 외교 수단이었을 뿐이다. 대명 관계에서는 상당히 탄력적이었고, 일본과 여진 관계에서도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15세기 후반기에는 국력 신장을 바탕으로 기미교린의 대상을 더 확대하는 양상을 보여 주었다.

즉, 1471년(성종 2) 편찬된 『해동제국기』와 1500년(연산군 6) 편찬된 『서북제번기』에는 ‘조선 중심의 국제 질서’라는 구상 속에서 일본·유구·여진이 기미교린의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두 책을 ‘외이열전(外夷列傳)’의 일종으로 편찬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 중심의 국제 질서’라는 구상 속에서 동남방의 해양 국가인 일본·유구와 서북방 만주 지역의 여진을 ‘외이(外夷)’로 파악하면서 기미정책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한 것이었다.

그런데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대외 관계와 인식이 소극화·경직화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또 조선후기에는 왜인과 야인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그 바탕에는 임진왜란을 통한 일본의 무력적 위세의 확인, 여진족의 통일과 청의 건국 및 중원의 통일, 두 차례의 호란(胡亂) 등 국제 정세의 변동이 있었다. 이에 따라 명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적 사대교린 체제가 붕괴되면서 조선의 대청(對淸)·대일(對日) 외교 체제의 변동이 이어졌다.

의의

조선초기 사대부들은 세계 인식으로서 주자학적 화이관을 수용하였고, 그 바탕 위에 자아 인식으로서 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을 확립하였다. 새로운 나라를 세운 왕조로서 화이·내외를 판별하는 것은 사회·국가 생활, 국제 관계의 계서적(階序的) 질서 형성의 기본이며, 역사 인식의 근본적 문제이기도 하였다. 이에 조선은 자신을 명과 함께 ‘중화’로 설정한 다음 일본·여진·유구·동남아 제국을 ‘이적’으로 간주해 기미교린의 대상으로 삼았다.

대일 관계에서 기미정책의 전형적인 모습은 대마도에 대한 정책에서 나타났다. 대마도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통하여 일본과의 교섭을 전담시키고 남쪽 변경의 안전을 도모한 것이 조선전기 이래 조선이 취해 온 정책이었다. 경제적 시혜를 줌으로써 외이를 복속시키고 대외적 평화를 도모하는 것은 외이기미책의 일반적인 유형이었다.

그런데 기미정책은 도래 왜인들이 무질서하게 폭주하던 조선전기의 상황에서는 왜인 통제를 위한 적극적인 방책의 하나로 기능하였지만,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의미가 반감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마도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계속하였는데, 이것은 명분과 관례의 준수를 중시하는 조선의 외교 정책에 기인하지만 최선의 방책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미온적이고 유화적인 일본 및 대마도 정책이 훗날 더 큰 재앙을 불러일으킨 측면도 없지 않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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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문관지(通文館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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