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文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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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마도주가 조선에 도항하는 왜인에게 발행하던 도항 증명서.

개설

문인(文引)은 원래 조선에서는 상인에 대한 세금 징수와 통제, 군사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행장(行狀) 또는 노인(路引)이라고도 하였다. 양인으로부터 상인·상선·재인(才人)·화척(禾尺)·수륙군정(水陸軍丁)·포작인(鮑作人)·군사·승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다가, 조선인뿐만이 아니라 왜인과 야인에게까지 확대 적용되었다.

이에 따라 삼포의 항구에 거주하는 왜인 가운데 고기를 잡아 생계로 삼는 조어왜인(釣魚倭人)과 상인은 차사원(差使員)이나 변장(邊將)의 노인을 소지하도록 하였고, 노인이 없이 경계를 넘어서 다른 고을에 가서 장사하는 것을 금하였다. 또한 도항왜인(渡航倭人)도 몰래 노인을 받아 사사로이 바다에 나아가 장사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태종 초부터 문인은 조선에 들어오는 왜인이나 야인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시기적으로 태종·세종대에는 행장이, 이후에는 노인이 주로 사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에 도항하는 왜인에게 행장이 처음으로 적용된 것은 1407년(태종 7)이었다. 그 당시 흥리선(興利船)의 정박 장소를 부산포와 내이포로 제한하면서, 각 섬의 통치자[渠首]에게 통보하여 행장을 발급하여 도만호가 있는 곳에 와서 정박하도록 하였다. 이때 조선에서는 대마도주·일기도주(壹岐島主)·구주의 수호대명(守護大名)과 기타 세력이 있는 자를 지정하여 행장을 발행해 주도록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흥리선은 그 지역 통치자의 행장을 휴대하여야 하였으며, 구주 방면에서 오는 사송선(使送船)은 구주절도사의 서계(書契)를, 대마도에서 오는 사송선은 대마도주와 기타 유력자의 서계를 각각 지녀야만 왕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1426년(세종 8) 대마도주 종정성(宗貞盛)은, 도항왜인에 대한 범람 방지책으로 사송선과 흥리선 모두에게 노인을 지급해 주었으므로 지금부터 노인을 가지지 않은 자는 접대해 주지 말도록 요청하였다. 이러한 요청은 대마도주가 대마도에서 통치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에서 비롯되었다. 이때부터 노인이 도항 증명서로 제도화되었으며, 이것이 대마도주 문인(文引)제도의 시작이었다.

노인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시행되었으며, 언제 문인으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고, 대마도주의 문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33년(세종 15) 대마도주 종정성에게 해물 채취선을 약탈해 간 범인을 색출해 줄 것을 요청한 예조의 서계였다. 이로 미루어 1433년경에는 대마도에서 조선으로 도항하는 배는 행장이나 노인 대신 반드시 도주의 문인을 가지고 왕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1435년(세종 17)에 대마도주가 사신을 보내 종성국(宗盛國)·종무직(宗茂直) 등 수도서인(受圖書人)도 문인이 없이 왕래하면 접대해 주지 말도록 요청하였다. 결국 대마도주 종정성은 문인제도를 대마도 안의 수도서인에게까지 확대 적용하여 그들을 자기의 통제 아래 두고자 하였다. 아울러 종정성은 자기의 문인을 받지 않고 전라도 등지에 가서 인명을 살해하고 온 자들의 목을 베어 보내는 등 문인제도를 더욱 강력하게 시행하려고 노력하였다.

조선에서는 1436년(세종 18)에 사송왜인(使送倭人)이 서계와 문인을 위조해서 오는 폐단을 막기 위하여 문인에 사송선의 크기, 각 선의 정관(正官)과 격왜(格倭)의 이름, 인원수 등을 기재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문인에 기재될 세부 항목이 정형화되었다(『세종실록』 18년 윤6월 26일).

1438년(세종 20)에는 왜사의 통제를 요청하기 위하여 경차관 이예(李藝)를 대마도에 파견하였는데, 그때 대마도주와 문인제도를 정약(定約)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이예와 대마도주 종정성 사이에 정약된 문인제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마도의 종씨(宗氏)와 조전씨(早田氏)는 물론 일기(壹岐)의 지좌(志佐)·좌지전(佐志殿), 구주의 전평전(田平殿)·대내전(大內殿), 살마주(薩摩州), 석견주(石見州) 등 여러 곳의 사송인도 대마도주의 문인을 가지고 와야만 접대를 허락한다는 것이었다(『세종실록』 20년 9월 18일).

이는 1435년(세종 17) 대마도의 수도서인에게만 적용하던 문인제도를 더욱 강화하여 지좌·좌지전·전평전 등 일기·송포(松浦) 등의 구주 지방 호족에게까지 확대 적용함으로써 일본의 모든 통교자를 도주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에서 문인 발급은 호조·병조·예조를 비롯하여 서울의 경우 한성부와 유후사가, 외방의 경우 도관찰사·도순문사·수령·만호 등의 지방관이 담당하였다. 그런데 왜인의 통제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문인의 발행권은 대마도주에게 주어졌다.

조선에서는 대마도의 정치·경제적 안정이 왜구의 재발을 방지하고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대마도주에게 문인 발행권을 주고 도주로 하여금 일본 각지에서 오는 왜사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도록 하였다. 반면에 대마도주는 문인제도를 이용하여 각처의 사신들을 통제하고 문인 발행에 대한 수수료인 취허전(吹噓錢)을 받음으로써 대마도에서 정치·경제적 지배권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변천

문인제도가 정약된 이듬해인 1439년(세종 21)에는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와 관령(管領)·무위사(武衛使)가 문인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가, 그 후 문인의 적용 대상이 확대되어 일본국왕사를 제외한 모든 통교왜인(通交倭人)은 대마도주가 발행하는 문인을 가지고 와야만 접대를 허락받고 교역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609년(광해군 1) 맺은 기유약조(己酉約條)에서는 일본국왕사도 문인을 지참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문인은 조선 연안에서 고기잡이하는 대마도 어선에도 적용되었다. 1441년(세종 23) 대마도주의 요청으로 맺은 고초도조어금약(孤草島釣魚禁約)에서 대마도의 조어왜인(釣魚倭人)은 반드시 도주의 문인을 소지하도록 규정하였으며, 문인을 소지하지 않은 자와 병기를 휴대한 자, 그리고 풍랑을 구실 삼아 지정된 수역 외의 지역을 횡행하는 자는 해적으로 간주하여 처벌하였다.

의의

왜인의 도항 증명서로 제도화된 문인제도는 조선 정부와 대마도주의 이해가 서로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강력하게 시행될 수 있었다. 1443년(세종 25) 맺은 계해약조(癸亥約條)와 더불어 문인은 조선에 도항하는 왜사를 통제하는 왜인 통제책 구실을 하였고, 일본을 조선의 외교 질서에 편입시켜 조선과 일본의 외교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 『경국대전(經國大典)』
  •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
  • 『통항일람(通航一覽)』
  • 『조선통교대기(朝鮮通交大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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