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척(禾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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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시대에 유기·가죽 제품의 제조, 도살 등에 종사하던 집단.

개설

화척(禾尺)은 고려·조선시대에 유기(柳器)·가죽 제품을 제조하거나 가축을 도살하는 등 천한 직업에 종사하던 집단을 말한다. 수척(水尺)·무자리라고도 하였다. 화척은 유목 민족인 달단(韃靼)의 후예로서, 나말 여초의 혼란기에 한반도로 들어왔던 양수척(楊水尺)이 고려후기에 화척으로 개칭된 것이었다. 조선초에는 화척을 다시 백정(白丁)으로 바꿔 불렀다. 고려시대의 백정은 일반 농민을 지칭하는 용어였으나 화척을 백정으로 칭하면서 일반 농민을 지칭하던 원래의 백정과 구별하기 위하여 이들은 신백정(新白丁)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화척은 떠돌아다니며 사냥이나 도살 등을 하고 수시로 도적질을 하여 조선 정부의 단속을 받았다.

고려시대 이래 이들은 국가에 신공(身貢)을 바쳤고, 1414년(태종 14)의 경우 저화(楮貨) 30장을 내자시(內資寺)에 납부하도록 했다. 화척의 유기 제조업·도살업 등은 천한 일이라 여겨 일반 양인들은 이들과의 혼인이나 거주를 꺼렸으며, 이들 또한 자기들끼리의 집단생활을 도모해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일시 거주하는 유랑 생활을 지속하였다. 따라서 화척은 전국적으로 존재했으며,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 특히 많았다. 이와 같은 집단적인 유랑 생활에서 화척은 걸식·강도·방화·살인 등을 자행하였다. 고려말의 홍건적 침입 때에는 길잡이 노릇을 했으며, 왜구를 가장해 민가를 약탈하기도 하였다.

이에 조선의 조정은 이들에게 토지를 지급해 농업을 생업으로 삼도록 하고, 그러한 자에게는 신공을 면제시켜 주는 정책을 태조 이후 성종 때까지 지속하였다. 그리고 독립된 집단생활과 자기들끼리의 혼인을 금지시키고, 일반 양인과 함께 거주하고 그들과 혼인하는 것을 장려하였다. 아울러 지방 관아로 하여금 이들을 찾아내어 각 방(坊)과 촌(村)별로 보호하게 하고, 장적(帳籍)을 만들어 형조(刑曹)·한성부·감영 및 각 고을에 보관했다가 출생·사망·도망 등의 사항을 철저히 점검하게 하였다.

담당 직무

화척은 특별한 직업이나 직역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며 사냥과 도살을 주요한 생업 수단으로 삼았다. 도살의 부산물로 생긴 가죽으로 가죽 제품을 만들기도 하였고 유기를 제조하여 판매하기도 하였다.

변천

조선 개국 초 도평의사사에서는 이들 집단을 재인(才人), 화척이라고 병칭하면서, 이들이 떠돌아다니면서 농업에 종사하지 않고 굶주리므로 모여서 도적질을 하고 소·말을 도살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들을 호적에 올리고 일정한 지역에 정착시켜 농업에 종사케 할 것을 건의하였다(『태조실록』 1년 9월 24일) (『태조실록』 4년 12월 25일).

국가에서는 이들 화척을 정착시키는 데 부심하였다. 그 조치로써 시행된 것이, 이들 재인과 화척의 칭호를 고려시대의 일반 농민을 지칭하는 용어였던 ‘백정’으로 개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반 백성과 함께 살면서 호적에도 등재하고 토지를 주어서 농사를 지으며 정착 생활을 하도록 권장하도록 하였다. 사냥이나 버들고리 제조, 갖바치 등의 직업에서 떠나 농업에 종사하게 하도록 권장한 것이다(『세종실록』 5년 10월 8일). 또한 이들 화척, 재인이었던 백정이 바치던 장흥고(長興庫)의 유기 공납도 다른 공납물과 마찬가지로 일반 민호에서 바치게 하도록 하여, 이들의 정착을 도왔다(『세종실록』 6년 3월 8일). 그러나 유기에 대한 수요와 공사(公私) 간의 잔치와 가죽 제품에 대한 수요로 화척이 소를 도살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에 대해서는 다시 논의하도록 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9년 10월 16일).

국가에서는 화척·재인 등에 대한 동화 정책의 성공을 위하여 다양한 시도를 하였지만, 실제로 각 지방에서는 화척·재인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재인·화척 등을 백정이라고 하여 일반 평민과 같이 살도록 한 국가의 본의를 왜곡하여, 그들을 고려의 일반 농민을 칭한 백정과 구분하기 위하여 ‘신백정’이라고 불렀다. 화척·재인도 사냥과 유기 공납 등의 잡역을 그대로 시행하고 있었다. 국가에서는 이것은 『원육전』이나 『속육전』 등 법전 규정을 위배한 것이니 그러지 말라고 지시하였다(『세종실록』 24년 8월 6일).

국가의 제반 시책은 어느 정도 정착되어, 화척이라는 용어는 조선초기 이후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대신 재인과 백정이 합쳐진 재백정(才白丁) 또는 재인백정(才人白丁)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지고 이들은 여러 가지 잡희(雜戱)를 하는 집단으로 바뀌어 갔다. 즉, 유기와 가죽 제품 제조, 수렵과 도살을 주로 하던 집단을 ‘신백정’이라고 지칭하면서 화척이라는 명칭은 공식적으로는 사라지지만, 그 기능을 계승한 재인이라는 명칭은 잡희와 나례(儺禮)에서 재주를 부리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정재인(呈才人)’, ‘재인’이라고 부르게 되면서 이제 재인은 백정과 함께 병칭하여 재인백정 또는 재백정이라고 불린 것이다(『중종실록』 19년 12월 18일).

재인은 연산군대에는 서울에 불러들여 나례희, 잡희를 공연하기도 하였으며, 궁중에서 왕도 이를 관람하고 재인에게 상(賞)을 내리기도 하였다. 재인은 특히 중국 사신들이 왔을 때 지방에서 차출되어 공연하였다(『중종실록』 31년 윤12월 13일) (『중종실록』 34년 2월 4일) (『선조실록』 1년 2월 6일). 또한 사냥이나 군사 훈련에서 일차적인 동원 대상이 되었다.

재인·화척 등은 도둑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세종실록』 26년 10월 9일) (『세종실록』 29년 3월 21일) (『단종실록』 즉위년 11월 1일).

참고문헌

  • 강만길, 「선초 백정고」, 『사학연구』18, 1964.
  • 鮎具房之進, 『花郎攷·白丁攷·奴婢攷』, 國書刊行會,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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