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白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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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도살이나 유기 제조 등을 주로 하며 집단적으로 생활하던 천민층.

개설

고려시대에 일반 농민층을 의미하던 백정(白丁)은 고려말과 조선초를 거치면서 평민·양민(良民)·촌민(村民)·백성 등의 용어와 혼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국가의 재인(才人)·화척(禾尺)의 양인화(良人化) 정책으로 이들의 칭호를 백정으로 개칭하면서 백정은 도살업이나 유기(柳器) 제조업을 전문으로 하는 천인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바뀌었다.

담당 직무

조선시대의 백정들은 유랑·수렵·목축·도살·유기 제조 등을 주된 생활 방편으로 삼았다. 반면 농경에는 별로 종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만의 집단을 형성해 거주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조선 왕조의 지배층들은 서울과 지방에 산재한 백정을 각 방(坊) 및 촌(村)에 섞여 살도록 하였다. 또한 호적에 올려서 백정의 출생·사망·도망 등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들을 농경 생활에 정착시키기 위해 토지를 지급하기도 하고 일반 백성들과의 혼인을 장려하기도 하며, 행장(行狀) 발급으로 자유로운 이동을 통제하고, 군역에 편입시키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능력 있는 자는 향학(鄕學)에 들어가고 과거 시험에도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변천

조선시대 백정의 기원은 삼국 통일 때까지 소급된다. 당시의 혼란한 상황에서 말갈인이나 거란인들이 우리나라에 흘러 들어와 양수척(楊水尺)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하였다. 이들이 그 뒤 화척(禾尺)으로 변모했다가 조선시대에 백정으로 개칭되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조선시대의 백정을 고려시대의 백정과 구분하기 위해서 ‘신백정(新白丁)’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였다. 이들을 백정 또는 신백정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1423년(세종 5)의 일이다. 병조(兵曹)에서는 재인(才人), 화척이 본래 양인(良人)이나 하는 일이 천하고 호칭이 특수해서 백성들이 자기들과 다른 부류로 생각하여 같이 혼인하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고 하였다. 따라서 앞으로는 화척을 고려시대 일반 백성의 명칭인 백정(白丁)으로 바꾸어 부르고 평민들과 섞여서 살도록 하며 호구에도 올리고 한전(閑田)이나 진황전(陳荒田)을 주어서 농업에 종사하게 하며 사냥의 역(役)이나 유기·가죽 제품에 대한 역을 견감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세종의 허락을 받았다(『세종실록』 5년 10월 8일).

이들 백정은 고려 이후에도 대내외적 혼란기를 틈타 계속적으로 한반도에 유입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백정 또는 그 전신인 화척은 대개 유목민 출신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이동 생활을 하면서 수렵·목축을 하기도 하고 유랑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유목 민족적 특성으로 인해 생활에 어려움이 생기면 자주 민가를 습격해 재물을 약탈하거나 방화·살인 등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외적과 내통하거나 외적으로 가장해 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고려말기에는 침입해 들어오는 거란군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향도(嚮導) 역할을 했고 왜구로 가장해 노략질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 이들의 일부는 유목민적 생활의 연장선상에서 유기 제조와 판매, 육류 판매 등의 상업에 종사해 그들이 제조한 유기와 피혁 제품을 공납하기도 하였다. 또 그들은 수렵·목축 등의 생활에서 터득한 짐승을 도살하는 기술을 살려 우마(牛馬)의 도살업에도 진출하였다. 이 우마의 도살과 그 판매는 이익을 남길 수 있었으므로 백정들은 도살과 판매를 생활의 적극적 방편으로 삼았고 독점성까지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살업은 백정들의 대표적인 직업으로 발전해 갔다.

조선중기 이후부터는 이들의 집단적 유랑이나 사회적 작란(作亂) 등이 거의 없어졌다. 그 대신 이전부터 행해 오던 직업인 유기 제조업·도살업·육류 판매업 등에 활발히 진출하였다. 조선시대의 백정은 신분적으로 천인이었으므로 기본적으로는 국가에 대한 각종 역(役)의 부담이 없었다. 그러므로 일반 평민 중에서도 생활이 곤란해지면 백정으로 변하는 자가 매년 늘어 백정의 수는 점점 증가하여 갔다.

백정은 1894년(고종 31)의 갑오경장으로 천인의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법제적으로 1894년 이후에는 백정이라는 신분층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왕조 500년을 통해 지속되었던 일반민의 이들에 대한 차별 의식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들과의 혼인은 물론 같은 마을에서 생활하는 것조차 꺼렸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자녀의 교육 문제에서 심한 차별을 받았고, 각종 집회 참가를 거부당했으며, 촌락의 공동 행사와 의복, 음주 등에서도 차별 대우를 받았다. 결국 조선말기와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서도 백정 신분은 엄연히 존재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전국에 산재해 있던 백정의 호수와 인구는 7,538호에 3만 3,712명이었다고 한다.

백정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관념적 차별은 일제 식민지 시기에 이르러 마침내 형평운동(衡平運動) 또는 형평사운동(衡平社運動)이라 불리는 백정들의 해방 운동을 초래하였다. 백정 층의 형평운동은 1923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백정 자산가였던 이학찬(李學贊)이 자제에 대한 교육 차별 사건을 계기로 형평사(衡平社)라는 사회단체를 조직하면서 시작하였다. 형평사의 활동은 당시의 언론과 각 사회단체로부터 적극적 지지를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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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명호, 「전시과 체제하 백정 농민층의 토지 소유: 토지 상속제와 관련된 검토를 중심으로」, 『한국사론』23, 1990.
  • 문철영, 「고려 말·조선 초 백정의 신분과 차역」, 『한국사론』26, 1991.
  • 이우성, 「여대(麗代) 백성고(百姓考): 고려시대 촌락 구조의 일단면」, 『역사학보』14,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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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武田幸男, 「高麗田丁の再檢討」, 『朝鮮史硏究會論文集』8, 1971.
  • 鮎貝房之進, 「白丁」, 『雜攷』5, 1932.
  • 池川英勝, 「朝鮮衡平運動について」, 『朝鮮學報』83,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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