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해약조(癸亥約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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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3년 조선이 일본 대마도주와 세견선·세사미두 등의 액수를 정한 약조.

개설

조선초기의 회유적인 왜구 대책으로 왜구들의 해적 행위는 줄어들었지만 대신 통교를 목적으로 하는 도항자가 급증하였다. 통교자의 급증과 도항 왜인들의 일방적인 상리(商利) 추구가 행해지면서 정부의 재정 부담이 늘어나자 통교 규제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종에서 성종 초기까지의 대일 통교 체제 확립 과정은 일관되게 통교 제한과 긴축 정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조선 정부의 통제책의 핵심은 대마도주에게 특수한 권한을 부여하여 통교 체제 확립에 주요한 일을 맡기는 것과 무역을 엄격히 제한하여 경제적 부담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태종과 세종대부터 본격화된 규제책 중 도항자를 제한하는 방책으로 포소(浦所) 제한과 도서(圖書)·서계(書契)·행장(行狀)·문인(文引)에 의한 통제 등이 있었다.

그런데 도항자에 대한 도서·서계·문인 등 여러 통제책이 최종적으로는 대마도주에게 위탁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운영상의 모순과 한계가 있었다. 결국 조선 정부로서는 통교자의 도항 횟수와 세견선 수, 교역량을 직접 통제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세견선 수의 정약(定約)과 접대 규정의 정비로 나타났다. 대마도주를 비롯한 일본 통교자의 세견선 수를 정약한 것이 계해약조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세견선의 정약이란 조선 정부가 매년 도항하는 사송선 수를 정하는 것이었다. 이는 중국이 외이(外夷)에 대하여 조공 횟수와 시기, 선박 수를 한정한 것과 유사하였다. 고려중기 일본 태재부(太宰府)의 진봉선(進奉船)에 대하여 정약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 일본에서 보낸 세견선의 시초는 1424년(세종 6) 구주탐제(九州探題)에게 봄가을로 2회 허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운용된 시기는 1443년(세종 25) 계해약조에 의하여 대마도주의 세견선을 정하면서부터였다. 계해약조는 1443년 대마도체찰사 이예(李藝)가 대마도로 가서 대마도주 소 종정성(宗貞盛)과 세견선 등의 액수를 정한 약조로 일본에서는 가길조약(嘉吉條約)이라고 하였다.

세견선만 하더라도 이전에는 무제한으로 허용되어 매년 100척이 넘었는데 이러한 현상을 통제하고 제한하는 것이 조선 조정의 목적이었다. 이런 방침에 의하여 대마도주의 세견선을 연간 50척으로 제한하였다. 계해약조의 체결로 조정은 대마도주의 교역 제한에 성공한 셈이었다. 대신 세사미두와 특송사선을 대마도주에게 보장해 주었다. 이에 따라 독자적인 통교를 허락한다는 의미에서 구리로 만든 인감인 도서를 대마도주에게 보내고, 도항증명서라고 할 수 있는 문인을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함으로써 다른 통교자를 정리하고 통제하고자 하였다.

내용

계해약조는 대일 통교 체제 확립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대마도주에게는 매년 200석의 쌀과 콩을 하사한다. ②대마도주는 매년 50척의 세견선을 보낼 수 있고, 부득이하게 보고할 일이 있을 경우 정해진 수 외에 특송선(特送船)을 보낼 수 있다.

계해약조는 조선시대에 일본과 성문(成文)으로 체결한 최초의 약조이다. 전문(全文)이 남아 있지 않고, 위의 두 항목만 전한다. 이것만으로는 대마도주와의 세견선·도주특송선(島主特送船)·세사미두를 약정한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대마도주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조선초기 대일 통교 체제의 기본 약조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계해약조를 계기로 일본의 다른 통교자들과도 모두 세견선 정약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조약 체결 이후 세견선 정약을 하지 않은 자는 도서와 서계를 가지고 와도 접대를 받지 못하였다. 즉, 세견선의 정약은 불법 도항자를 선별하는 기준이 되었다.

세조대에는 대마도주와 종씨(宗氏) 일족·수도서인(受圖書人)·수직인(受職人)·일본 본토 각지 호족들의 사송선에 대한 정약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 6척, 제거추사(諸巨酋使) 20척, 구주탐제 30여 척, 수직인 27명에 27척, 수도서인 15명에 15척 등으로 세견선 수가 정해졌다. 이 당시 대부분의 통교자는 보통 1척에서 2척 정도의 세견선을 인정받았고, 일본국왕사도 6척이었다. 이를 통하여 50척의 세견선을 받은 대마도주가 얼마나 중시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밖에 대마도주는 세견선 외에 특송선을 파견할 수 있었는데, 특송선은 세견선보다 우대를 받았다. 그리고 대마도주는 매년 200석에 달하는 쌀과 콩을 하사받았다. 대마도주는 조선과의 이러한 무역상 특권을 이용하였고, 조선 통교권의 일부를 가신들에게 분배하면서 도내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한편 세견선 수가 세종 말기부터 확대되어 세조대는 사송선이 연간 400여 척에 달하였다. 이에 성종 초기 사송선의 명의를 사칭하는 것을 막고 세견선의 정수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그 결과 『해동제국기』와 『경국대전』의 규정을 보면 1년에 입국 선박 수가 220여 척으로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도항 왜인의 수가 1년에 5,500명 내지 6,000여 명에 이르렀고, 무역을 제외한 순수 접대 비용이 10,000여 석에 달하였다.

한편 실제는 규정된 것보다 물론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1509년(중종 4)의 경우 한 해의 접대 비용이 22,000석에 달하였다고 한다. 세사미두도 대마도주에게 주는 200석을 비롯하여 대마도에만 매년 350석을 지급하였다.

변천

계해약조는 조선초기 대일 통교 체제의 틀을 정하는 기본적인 조약이었지만 이후 상황 변화에 따라 몇 차례 개정되었다. 삼포왜란 후 1512년(중종 7) 체결된 임신약조, 사량진왜변 후 1547년(명종 2) 약정된 정미약조, 을묘왜변 후 1557년(명종 12) 체결된 정사약조 등이 그것이었다.

1510년 삼포왜란이 발발하자 조선 정부는 바로 대마도와의 통교를 중단하였다. 일본에서는 막부에서 일본국왕사 붕중(棚中)을 파견하여 강화안을 제시하며 대마도와의 통교 재개를 요청하였다. 붕중을 매개로 한 강화 교섭 중 대마도주가 주모자의 참수내헌(斬首來獻), 피로인 송환 등 조선의 요구 조건을 이행하자 조정은 1512년 임신약조를 체결하여 교역 재개를 허락하였다.

임신약조의 내용은 ①삼포(三浦)에서의 왜인 거주 불허, ②대마도주 세견선을 50척에서 25척으로 반감, ③대마도주 세사미두를 200석에서 100석으로 반감, ④대마도주의 특송선 폐지, ⑤대마도주 일족과 수직인·수도서인의 세견선·세사미두 폐지, ⑥대마도주 파견 이외의 사송선은 적왜(敵倭)로 간주해 처단, ⑦일본 본주(本州)의 수직인·수도서인 정리, ⑧포소와 해로(海路) 제한, ⑨국왕사를 제외한 상경 왜인의 무기 휴대 금지 등 9개 조로 이루어졌다. 삼포왜란 전에 비하여 대폭적인 제한을 가한 것으로 경제적 요소와 질서 유지라는 측면에서 조선 조정의 강경한 입장이 반영되었다.

1544년(중종 39) 200여 명의 대마도인이 20여 척의 배를 타고 사량진(현 경상남도 통영군 사량면)을 침략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을 사량진왜변이라고 하는데, 왜구의 일종이었다. 사량진왜변이 일어난 후 조선 정부는 막부와 대내(大內)·소이(小貳) 씨를 제외하고 대마도에 대해서는 일절 통교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막부와 소이 씨의 거듭된 통교 재개 요청과 대마도주의 간청에 의하여 3년 후인 1547년 정미약조를 체결하고 교역 재개를 허락하였다.

정미약조의 내용은 ①세견선의 크기와 선부수(船夫數) 규제, ②대마도주의 세견선을 25척으로 줄이고 선상집물(船上什物) 지급제 일절 폐지, ③가덕도 이서로 접근하는 자는 적왜로 간주해 처단, ④50년이 경과된 수도서인·수직인 접대 폐지, ⑤잠상(潛商: 현 밀무역)을 금지하고 지정 범위 외에서 행동하는 자는 영구히 접대하지 않음, ⑥모든 약조는 진장(鎭將)의 명령에 복종할 것 등의 6개 조로 이루어졌다.

임신약조의 내용보다 더 가혹하게 대마도주의 무역량을 제한하고 수직인·수도서인을 정리하였으며, 위반할 경우 벌칙까지 명시하였다. 정미약조의 체결로 가까스로 교역은 재개되었으나 이전과 같은 평화로운 통교 관계는 어려워졌다.

15세기 후반 일본에서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혼란스런 상황으로 왜구가 다시 성행하였다. 후기왜구로 불리는 이들은 주로 명의 연안을 노략질하였지만 조선에도 출몰하였다. 사량진왜변 이후 명종 말년까지 30여 회의 크고 작은 왜구 침략이 있었는데, 그중 1555년(명종 10)의 을묘왜변이 가장 규모가 컸다.

을미왜변은 왜선 70여 척이 동원되어 달량포(현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에 들어와 전라병사와 장흥부사를 살해하고 영암까지 침입한 사건이었다. 을묘왜변 이후 조선에서는 비변사를 설치하여 대일 경계를 강화하였다. 2년 후인 1557년 정사약조를 체결하여 통교를 허락하였다. 을묘왜변 이전보다 사송 왜인들의 접대 비용을 감축하였고, 왜구에 대비하여 생포된 왜인들도 기술자를 제외하고는 처단하는 강경 조치를 취하였다. 을묘왜변 후인 명종 말기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교역과 왜구가 동시에 진행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되었다.

의의

계해약조 이후 1512년 체결된 임신약조나 1547년 약정된 정미약조 등에서 다소 내용이 바뀌지만, 그것들은 모두 계해약조를 기본으로 하여 조정되었다. 이 점에서 계해약조는 조선전기 대일 통교 체제의 틀을 이루는 기본적 조약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계해약조의 체결로 조선초기 이래의 교린 체제 확립 과정에서 큰 진전을 이루게 되었다. 즉, 세견선 정약을 축으로 사송선의 통제책이 계통적으로 운영되었고, 이에 따르는 여러 제도가 갖추어져 성종 초기에는 일본국왕사 이하 모든 통교자가 체계화되어 통교 체제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계해약조의 체결로 일본과의 관계가 안정되자 세종은 여진족에 대한 대책으로 전향해 북쪽 변경에 4군과 6진을 설치하였다. 고려말기부터 지정학상 북로남왜(北虜南倭)에 시달려 왔던 조선으로서 성공적인 정책이었다. 조선건국 이래 지속된 대일 정책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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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국대전(經國大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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