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圖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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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선에 입국하는 왜인에게 통교의 증명으로 삼기 위해 발급한 도장.

개설

도서(圖書)는 조선 정부가 일본의 지방 호족이나 통교상의 공로자에게 지급한 일종의 사인(私印)으로, 인면(印面)에는 통상적으로 통교자의 실명을 새겼으므로 관인(官印)과 구별하여 도서라고 하였다. 왜인들은 조선에 도항할 때에 가지고 오는 서계(書契)에 찍어 통교상의 증명으로 삼았다. 도서를 발급받은 자를 수도서인(受圖書人)이라 하였는데, 이들은 조선에 사자를 파견하여 통교 무역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받았다.

도서 제도는 조선으로부터 통교상으로 우대를 받으려는 왜인의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기록상으로 처음 도서를 발급받은 자는 1418년(세종 즉위)에 서해로 미작태수 정존(淨存)이며, 1419년(세종 1) 관서로 축전주 석성부관사 평만경(平萬京)이 통교상의 증명으로 삼기 위해 ‘만경(萬景)’의 도서를 요청하여 발급받으면서, 도서가 통교상의 증명서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세종 초에 이르러서는 도서가 왜인 회유책의 일환으로 발급되기 시작하였으며, 발급 범위도 대마도나 일기(壹岐) 지방의 호족에게까지 확대되었다. 그 결과 도서는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왜인의 통교를 제한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그리하여 대마도 정벌을 계기로 대마도주 종정성(宗貞盛)에게 ‘종씨도도웅와(宗氏都都熊瓦)’라 새긴 도서를 발급하여 그 지방의 통교자는 도주가 친히 서명한 서계를 지참하도록 하였고, 마지막 번주인 종의달(宗義達)까지 도서를 발급받았다.

도서의 발급은 왜구의 통제 및 피로인(被虜人)의 송환, 외교상의 공로, 그리고 일본 내에서 세력의 강약을 고려하여 이루어졌다. 도서는 원래 부자간이라도 차용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부자간의 도서 계승이 매우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도서인이 사망하면 상속자가 조선에 요청하여 새로 발급받았다. 조선에서는 서울의 예조와 전교서, 개항장인 포소(浦所)에 왜인에게 발급한 도서와 똑같은 것을 두고 입국 왜인들이 서계에 찍어가지고 온 도서의 진위 여부를 철저히 조사하였다.

대마도주는 도서를 조선과의 통교에서 자신의 권한을 확대하고 나아가 대마도에서 정치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일례로 1434년(세종 16)에 대마도주 종정성은 사신을 보내 서계에 찍는 도서의 위치를 달리하여 도주 자신의 청인 경우에는 자신의 이름인 ‘종정성’ 위에, 그 밖에는 직함인 ‘대마주태주’ 위에 도서를 찍어 보낼 것이므로, 이를 구분하여 접대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것은 후에 도항의 목적에 따라 서계에 찍은 도서의 수를 달리하여 매우 긴급한 경우에는 삼저도서(三著圖書), 그다음은 이저도서(二著圖書), 그리고 긴요하지 않은 경우에는 일저도서(一著圖書)로 나누어서 구분하는 밀약으로 발전하였다.

도서는 조선 정부가 왜인 통제책의 일환으로 수직 제도와 수도서 제도를 통해서 왜구와 일본의 지방 호족을 조선의 외교 체제 속에 편입하고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 하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에서는 수도서인이 증가하자 15세기 중엽부터 통교를 제한하기 시작하여, 대마도의 수도서인선(受圖書人船)도 도주의 세견선(歲遣船) 50척에 포함시키려고 하였다. 1455년(단종 3) 한 해 동안 조선에 도항한 왜인이 6,116명에 이르자 위약자들에 대한 규제를 더욱 강화하여, 1470년(성종 1) 심처(深處) 수도서인의 세견선을 정약(定約)하기 시작하였고, 1477년(성종 8)에는 수도서인의 세견선 정약을 마무리함으로써 모든 수도서인은 세견선을 정약하여야만 조선에 도항할 수 있도록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도서의 발급은 주로 왜인의 요청으로 이루어졌고, 소유자가 사망하면 상속자가 도서를 반납하고 자기 명의의 도서를 발급받았다. 그런데 15세기 말부터 수도서인이 사망했어도 도서를 반납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거나, 혹은 타인에게 매각하기도 하는 등 도서의 불법적인 사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에 조선에서는 1509년(중종 4)에 수도서(受圖書)·수직(受職) 후 50년 이상 된 자의 통교를 금지하는 등 강경한 조치를 취하였으며, 이것은 삼포왜란(三浦倭亂)의 한 요인이 되었다.

1512년(중종 7)에는 임신약조(壬申約條)에 따라 대마도주를 제외한 대마도인의 도서를 모두 폐지하였고, 심처왜인(深處倭人)도 도서를 받은 시기와 통교상의 공로 등을 감안하여 접대 여부를 결정하였으며, 통교를 허락한 자에게는 새로운 도서를 다시 발급하였다. 1528년(중종 23)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가 대우전 원의감에게 도서를 발급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40년 전의 수도서인은 접대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임신약조의 조항을 들어 거절하였다(『중종실록』 23년 윤10월 5일). 그 뒤에도 대마도주는 계속해서 세견선 5척을 늘려줄 것과 통교가 폐지된 심처왜인의 통교를 부활하려고 노력하였다.

1547년(명종 2)에 정미약조(丁未約條)에 의거하여 통교가 중단된 구주 지방의 제추(諸酋)와 수도서인에 대해 다시 접대를 허가해줄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그러나 논의 결과는 알 수 없고, 다만 1554년(명종 9)에 편찬한 『고사촬요』에 수도서견선인(受圖書遣船人)이 15명, 수직인이 26명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1563년(명종 18) 일본국왕사가 삼포왜란 이후 접대가 폐지되었던 30명의 접대를 다시 부활시켜줄 것을 요청함에 따라 10명의 도서를 환급해주고 접대를 부활하였다. 1567년(명종 22) 일본국왕사가 다시 20명의 도서 발급을 요청하자 1563년 당시 접대가 부활되지 않았던 20명 가운데 『해동제국기』·『약조책』·『도서책』 등에 기록된 12명의 도서를 환급해주었다. 이처럼 대마도주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심처 수도서인의 통교를 부활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부활된 수도서인의 통교권을 돌려주지 않고 자신이 차지함으로써 통교 무역권을 장악하였다.

임진왜란 후에 성립된 기유약조(己酉約條)에서는 대마도주에게만 전례에 따라 도서를 발급하고, 나머지 왜인의 도서는 모두 폐지하였다. 이에 대마도주는 줄어든 통교 무역의 회복을 위하여 유천씨(柳川氏)와 만송원(萬松院) 등의 도서를 발급받았는데, 그중 유천씨의 도서는 1635년(인조 13)에 유천 사건으로 폐지되었다. 대마도주 세견선과 도서에 의한 통교는 1871년(고종 8)까지 계속되었다.

형태

도서의 실물은 ‘길견(吉見)’과 마지막 대마번주의 ‘의달(義達)’, 대마도국분사(國分寺) 주지의 ‘숭통(崇統)’ 등 다수가 남아있다. 그중 대마도 주지의 도서인 ‘숭통’은 가로 3.8㎝, 세로 4㎝, 무게 173g이며, 동(銅)으로 주조하였고, 현재 일본 문화청에 보관되어 있다. 대마도에서 조선 정부로부터 공식으로 발급받은 도서는 모두 동으로 만들었다. 1990년대 중반 대마도 종가(宗家)에 비장되어 오다가 발견된 도서 23개는 모두 목인(木印)으로 대마도에서 위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목인은 현재 구주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
  • 『증정교린지(增訂交隣志)』
  • 이현종, 『조선전기 대일교섭사연구』, 한국연구원, 1964.
  • 하우봉, 『강좌한일관계사』, 현음사, 1994.
  • 長節子, 『中世日朝關係と對馬』, 吉川弘文館, 1987.
  • 中村榮孝, 『日鮮關係史の硏究』, 吉川弘文館, 1965.
  • 한문종, 「조선전기 대일 외교정책 연구 -대마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 田代和生·米谷均, 「宗家旧藏圖書と木印」, 『朝鮮學報』 156, 1995.
  • 『對馬と韓國との文化交流史展』, 長崎縣立對馬歷史民俗資料館,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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