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분사(國分寺)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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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국분사 |
한글표제 | 국분사 |
한자표제 | 國分寺 |
관련어 | 총국분사(總國分寺), 국분니사(國分尼寺), 쇼무천황[聖武天皇], 쓰시마[對馬島],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일본 |
시대 | 나라[奈良] |
집필자 | 윤기엽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국분사(國分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10년 5월 6일, 『순조실록』 11년 7월 8일 |
일본 나라시대에 구니에 호국 기원을 목적으로 세워진 관립 사찰.
개설
국분사(國分寺)는 국분니사(國分尼寺)와 함께 8세기 일본 나라시대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사찰로, 국가불교 체제 아래 불교진흥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다. 특히 쓰시마의 국분사는 조선초부터 절의 주지가 조선에 공물을 바쳤으며, 19세기 조선통신사 일행이 묵었던 장소이기도 하여 한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내용 및 특징
국분사는 일본 나라시대[奈良時代] 741년(천평 13) 쇼무[聖武]천황의 칙령에 의해서 각 구니[國]에 세워진 절이다.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전국의 중요한 지역에 건립된 호국 기원의 사찰이다. 구니는 일종의 지방국으로 봉건 영주들이 다스리는 제후국과 같은 개념이었다. 국분사는 당나라 유학승인 겐보[玄昉]의 진언에 따라 중국의 제도를 본떠 세운 것으로, 당시 사회가 불안하고 전염병이 유행하자 건립 칙령이 내려졌다.
741년 쇼무천황은 ‘국분사건립의소(國分寺建立の詔)’를 발표하여 나라의 동대사(東大寺)를 전국의 국분사를 관장하는 총국분사(總國分寺)로 삼고, 법화사(法華寺)를 비구니 사찰인 국분니사(國分尼寺)를 관장하는 총국분니사(總國分尼寺)로 삼았다. 국분사의 정식 명칭은 금광명사천왕호국지사(金光明四天王護國之寺)이고, 국분니사의 정식 명칭은 법화멸죄지사(法華滅罪之寺)라고 하는데, 통상 국분사로 명명한다. 쇼무천황이 전국에 국분사를 설립하도록 한 것은 당시 크게 유행한 질병과 재해를 막기 위해서였다. 739년 천연두로 많은 사람들이 죽자 구니마다 불상과 보살상을 조성하고, 『대반야경(大般若經)』을 사경하도록 했고, 다음 해에는 『법화경(法華經)』을 사경하고 7층목탑을 건립하도록 하였다. 그래도 전염병이 진정되지 않자 741년 칙령으로 전국의 주요 지역에 국분사를 건립하도록 한 것이다. 국분사에는 승려 20명을 두고, 매월 8일에 대승불교 경전의 하나인 『최승왕경(最勝王經)』을 전독(轉讀)하도록 했다. 쇼무천황의 국분사 건립은 690년 당나라측천무후(則天武后)가 장안(長安)을 비롯해 각 주마다 대운광명사(大雲光明寺)를 두게 한 것을 모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8세기 후반에 제작된 『연력승록(延曆僧錄)』에 의하면 총 62개 구니에 124개의 국분사와 국분니사가 있었다고 한다.
변천
741년 쇼무천황의 칙령으로 전국 주요 지역에 국분사가 설립될 때 쓰시마 역시 국방상의 요충지로 인식되어 국분사가 건립되었다. 조선 성종(成宗) 때 쓰시마 국분사의 주지는 쓰시마의 태수 등과 함께 조선 정부에 정기적으로 공물을 바치기도 했다(『성종실록』 10년 5월 6일). 이것은 조선이 쓰시마 정벌 후 부산포·내이포(제포, 현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염포(현 울산) 등의 삼포(三浦)를 개항하며 유화책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은 1396년(태조 5)과 1419년(세종 1)에 왜구(倭寇)의 본거지인 쓰시마를 정벌하는 강경책을 구사했지만, 도주(島主)의 요청에 의해 1426년(세종 8) 삼포를 개방하여 무역을 허락하고 왜관(倭館)을 두어 거주를 허락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쓰시마의 국분사는 19세기 초 조선에서 파견한 통신사 일행이 머물던 숙소가 있던 장소였다. 쓰시마는 임진왜란 후인 1607년(선조 40) 조선과 도쿠가와[德川] 막부(幕府) 정권 사이에 국교가 재개되어 조선에서 파견한 통신사 일행이 가장 먼저 머물다 간 곳이다. 조선통신사는 보통 부산에서 쓰시마 사절단의 안내를 받아 쓰시마, 시모노세키[下關], 아카시[明石], 사카이[堺], 교토[京都], 나고야[名古屋]를 거쳐 에도[江戶], 즉 지금의 도쿄에까지 가기 마련이었다. 1811년(순조 11) 조선의 12회차 통신사이자 마지막 통신사가 도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齊]의 쇼군[將軍] 책봉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당시 막부 정권은 전과는 다르게 사절단을 에도에서 맞지 않고 가까운 번(藩)에서 맞는 역지빙례(易地聘禮) 정책을 써서, 조선통신사 일행은 쓰시마에서 국서를 전달하고 귀국하게 되었다(『순조실록』 11년 7월 8일). 그때 통신사 일행이 묵었던 객관이 바로 쓰시마 국분사의 산문(山門)이 있던 장소였다. 대마도의 객관은 메이지 때 해체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참고문헌
-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근대 동아시아의 불교학』, 동국대학교출판부, 2008.
- 탁경백, 「일본 국분사 건립으로 본 목탑 변천과정 연구」, 『2010 한국건축역사학회 학술발표대회논문집』, 한국건축역사학회, 2010.[[분류:나라[奈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