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宗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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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계(父系)의 동성(同姓) 친족親族) 또는 조선시대 국가적 편제의 대상이 되어 예우와 규제를 받던 왕의 일정 범위의 동성 친족.

개설

종친(宗親)은 기본적으로 성씨가 같은 혈연집단을 의미한다. 혈연집단의 구성 원리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데 중국에서는 고래로 부계를 중심으로 하는 혈연집단이 발달하였다. 따라서 중국에서 종친이란 부계가 같은 혈연집단을 의미하였다. 부계를 중심으로 하는 친족 제도는 고려시대에 성리학이 수용되면서 우리나라 역사에도 본격적으로 침투하게 되었다. 특히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하던 신진 사대부들이 조선왕조를 건국하면서 국가와 사회의 가족제도는 부계 혈연을 기본으로 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종친은 부계의 동성 친족 전반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국가적 편제의 대상이 되어 예우와 규제를 받던 왕의 일정 범위의 동성 친족을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하였다. 부계의 동성 친족 전반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서의 종친은 촌수에 관계없이 모든 동성 친족을 포괄하며, 따라서 모든 부계 혈연집단이 자신들의 동성 친족을 종친이라 하였다. 반면 조선시대의 종친은 왕족 중에서 국가적 편제의 대상이 되는 일정 범위의 동성 친족을 의미하기도 하였는데, 이때의 종친은 오직 왕족만을 대상으로 하였고 왕족 중에서도 국가적 편제의 대상이 되는 일정 범위의 왕족만이 대상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예컨대 조선시대의 종친부, 족친위 등 국가 제도와 관련되는 종친이 그러하였다. 본 사전의 대상이 되는 종친은 일반명사로서의 종친이 아니라 국가적 편제의 대상이 되었던 일정 범위의 왕족으로서의 종친이다.

조선시대에 종친이 국가적으로 문제시된 이유는 일정 범위의 왕족을 대상으로 국가적 규제와 예우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비해 조선시대의 사회구조 및 가족제도가 크게 바뀌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만 해도 왕족은 최고의 봉록과 작위는 물론 내외의 중요 관직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는 왕족의 경우 녹봉과 작위만 후하게 주고 관직은 원칙적으로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관직을 금지하는 왕족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정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것은 당시 고려의 친족 제도 및 친족 의식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고려시대에는 관직을 금지하는 왕족을 왕자들 당대에만 한정했으며 관직이 금지된 왕자들에게는 작위를 책봉하였는데 이는 왕실 족내혼과 직결되었다. 이 같은 제도는 원나라 간섭기를 거치면서 근본적인 변화를 맞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원나라의 강요에 의해 왕실 족내혼이 폐지되었고 또한 성리학의 수용으로 동성 친족 간의 혼인을 기피하는 성리학자들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선 건국 과정에서 태조의 왕자와 사위 등 태조의 친·인척들은 사병을 보유하고 큰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조정의 요로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 건국 이후 태조대의 왕자 및 종친들은 재내제군소(在內諸君所)에 소속되었고 부마와 외척들은 이성제군소(異姓諸君所)에 소속되어 봉군 등의 특권도 누렸다. 따라서 조선 건국 이후 병권과 실권을 장악한 왕족들의 정치 배제 및 예우가 국가적 사안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정종이 즉위한 후 사병이 철폐되고 이어서 기년(朞年) 친족과 대공(大功) 친족의 관직을 금지하였는데, 이는 왕족 중에서 왕의 4촌 이내의 가까운 친족이 관직 금지의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당시 군사와 정치의 실권을 쥔 왕족들이 이들이었기에 우선 이들을 대상으로 관직을 금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원칙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상황에 따른 임시방편적인 성격이 컸다. 이에 태종, 세종대를 거치면서 유교적 친족 조직 자체에 입각한 왕족 규제가 나타나게 되었다.

재내제군소는 태종대에 재내제군부(內在諸君府)로 승격되었고 세종대에는 종친부로 바뀌었다. 세종은 종친부에 소속되는 왕족의 범위를 유교적 친족 조직에 기초하여 확정하고 그 왕족들은 종친부의 작위를 받는 대신 과거 응시를 금지하고 관직도 갖지 못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종친부에 소속되는 종친들이 곧 국가적 규제와 예우를 받는 일정 범위의 왕족들이었다.

내용 및 특징

유교에서는 혈연적 친소, 원근에 따라 친족 집단을 차등적으로 편제하였다. 부계의 동성 친족은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는 면에서 크게 보면 모두 종친이지만 혈연적 친소, 원근에 따라 오복친(五服親)으로 구별되었다. 5복친이란 특정 조상을 기준으로 4대의 현손까지 차등적으로 상복(喪服)을 입게 하고, 4대에서 벗어나는 5대 후손은 단문(袒免)을 하게 하지만 여기부터는 친족의 의리가 다한 것으로 간주하여 이를 친진(親盡)이라고 불렀다. 친진이 되기 전의 친족 간에 입는 상복이 바로 5복이었다. 조선시대의 이 같은 유교적 친족 구성은 『예기』, 『의례』 등의 경전과 『주자가례』를 근거로 하였다.

조선 초기 국가적 규제와 예우의 대상이 되었던 왕족도 이 같은 친족 구성을 기준으로 하였다. 세종은 종친부의 작위를 받는 종친의 범위를 유교의 친족 조직에 근거하여 5복친으로 확정하였다. 세종은 5복을 기준으로 하고 여기에 적서(嫡庶)를 고려하여 종친의 봉작명 및 품계를 자세하게 정하였다. 세종은 중국의 봉작제를 참조하여 종친의 봉작명을 정하였는데, 2품 이상은 윤(尹), 3품은 정(正), 4품은 령(令), 5품은 감(監), 6품은 장(長)으로 하였다. 세조대에 이르러 종친 봉작은 보다 정밀하게 세분화되었으며 새로운 봉작명도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정3품은 정, 종3품은 부정(副正), 정4품은 령, 종4품은 부령(副令), 정5품은 감, 종5품은 부감(副監), 정6품은 장으로 구분되었다. 아울러 세종은 종친계(宗親階)를 신설함으로써 문무 관료를 대상으로 하는 문산계(文散階)와 무산계(武散階)보다 종친들을 우대하고자 하였다. 이는 종친들의 관직을 금지하는 대신 높은 명예를 주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였다.

세종과 세조대에 정비된 종친 봉작 제도는 원칙과 명칭에서 약간의 변화를 거쳐 『경국대전』의 종친부 조항으로 수용되었는데, 무품계의 대군(大君)군(君), 정1품에서 종2품까지의 군, 정3품의 도정(都正), 정3품의 정, 종3품의 부정, 정4품의 수(守), 종4품의 부수(副守), 정5품의 령, 종5품의 부령, 정6품의 감이 그것이었다. 또한 종친계에는 정1품의 현록대부(顯祿大夫)·흥록대부(興祿大夫), 종1품의 소덕대부(昭德大夫)·가덕대부(嘉德大夫), 정2품의 숭헌대부(崇憲大夫)·승헌대부(承憲大夫), 종2품의 중의대부(中義大夫)·정의대부(正義大夫), 정3품의 명선대부(明善大夫)·창선대부(彰善大夫), 종3품의 보신대부(保信大夫)·자신대부(資信大夫), 정4품의 선휘대부(宣徽大夫)·광휘대부(廣徽大夫), 종4품의 봉성대부(奉成大夫)·광성대부(光成大夫), 정5품의 통직랑(通直郞)·병직랑(秉直郞), 종5품의 근절랑(謹節郞)·신절랑(愼節郞), 정6품의 집순랑(執順郞)·종순랑(從順郞)이 있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종친 봉작은 다음과 같이 운영되었다. 왕의 본부인인 왕비가 출생한 아들들은 대군이 되었다. 대군을 봉작하는 연한은 따로 없었고 적당한 시기에 봉작하도록 하였다. 이에 비해 왕의 후궁들이 출생한 아들들은 군이 되었는데, 이들은 7세가 되면 봉작되었다. 대군과 군은 무품계로서 정1품의 위에 해당하였다. 이는 왕의 아들들은 명분상 신료들보다도 상위의 존재라는 명분상의 문제에서 나타난 결과였다. 이외에 왕의 손자나 증손자 또는 현손자는 대수와 적서 관계에 따라 종친부의 작위를 받고 차차로 승진하도록 하였다. 종친부의 봉작을 받은 종친들은 작위에 따른 토지와 녹봉을 받아 생활하였다.

종친과 함께 종친의 처도 봉작되었다. 조선초기 종친의 처에 대한 봉작이 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태종대에 이르러서였다. 태종대에 정해진 종친의 처에 대한 봉작명은 다음과 같았다. 대군의 처는 정1품의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군의 처는 정1품의 모한국부인(某韓國夫人), 정2품과 종2품의 군의 처는 이자호택주(二字號宅主), 정3품 원윤(元尹)과 종3품 정윤(正尹)의 처는 신인(愼人), 정4품 부원윤과 종4품 부정윤의 처는 혜인(惠人)이었다. 종친의 처를 대상으로 한 봉작법에서는 봉작명으로 ‘삼한국’ 또는 ‘모한국(某韓國)’과 같은 국명이 이용된 것이 특징이었다. 이외에 종친의 처 중에서는 오직 적처만이 봉작의 대상이 되었다.

태종대에 정해진 종친 부인의 봉작명 중에 삼한국과 같은 국명이 이용된 봉작명은 세종대에 들어 개정되었다. 그것은 국명이 봉작명으로 사용되는 것은 신하의 명분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 때문이었다. 동시에 삼한국 등의 국명은 한정되어 있는데 봉작을 받을 대상자는 무수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같은 국명을 갖게 되어 혼란이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 때문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세종대에 종친 처의 봉작명은 정1품의 처는 모부부인(某府夫人), 종1품의 처는 모군부인(某郡夫人), 정2품과 종2품의 처는 모현부인(某縣夫人)이 되고 그 이외는 전과 같았다. 세종대에 결정된 종친의 처의 봉작은 약간 세분화되어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종친부에 소속되어 국가적 규제와 예우를 받던 종친들은 과거 응시가 금지되고 관직을 맡을 수 없다는 규제를 받았지만 그 대가로 종친부의 작위뿐만 아니라 형사상, 신분상, 경제상 다양한 예우를 받았다. 종친은 범법하였을 경우 1등 감형되는 예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망할 경우 치부(致賻)를 받았고 증시(贈諡), 추증(追贈) 등의 예우도 받았다.

종친부의 작위를 받는 종친들은 왕실 족보에 기록되기도 하였다. 왕실 족보는 종부시(宗簿寺)에서 작성하였으며 『선원록(璿源錄)』이 대표적인 왕실 족보였다. 『선원록』에는 특정 왕의 6대 내외 후손까지만 수록되었는데, 이는 6대 이내의 종친들을 예우하기 위해서였다. 즉 4대 이내는 종친부의 작위를 주기 위한,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5대와 6대는 군역과 천역에 종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왕실 족보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특정 왕의 아들과 딸들에게 소생이 있을 경우 매 3년마다 소생의 이름과 생년 등을 종부시에 보고하였다. 만약 특정 왕의 증손자 또는 현손자가 출생하면 각자의 부(父)가 가장으로서 보고하였다. 이는 왕실 족보를 작성하기 위한 단자(單子)를 가장의 명의로 올리기 때문이었다. 단자는 신고자가 한양에 사는 경우와 지방에 사는 경우로 나누어 다르게 작성하였다. 반면 신고자가 한양에 거주할 경우에는 서명한 단자를 신고자 자신이 종부시에 올렸다. 신고자가 지방에 살 경우에는 지방관의 확인을 거치도록 하였다. 아울러 향소(鄕所) 임원과 문중의 확인을 거치게 하였는데 이는 지방에 거주하는 신고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변천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에서 중앙 관제는 왕실 업무를 관장하는 궁내부와 일반 국정 업무를 관장하는 의정부의 2원 체제로 바뀌었다 1894년 7월 18일자에 군국기무처에서 제의한 개혁안에 의하면 종친부는 종정부(宗正府)로 바뀌어 궁내부에 소속되었으므로 종친들은 종정부에서 관할하게 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궁내부에 소속되어 있던 종정부는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되면서 폐지되기에 이르렀으며, 고종과 순종의 형제와 아들들만이 일제의 봉작을 받게 되었다.

의의

조선시대의 종친은 5복친이라고 하는 유교적 친족 조직을 기준으로 국가적 규제와 예우를 받던 일정 범위의 왕족으로서 종친의 정치 참여를 배제함과 동시에 왕족에게 합당한 예우를 해주기 위한 현실적 필요에서 나타났는바, 조선왕조의 구조와 그 성격을 잘 보여주는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김성준, 『한국중세정치법제사연구』, 일조각, 1985.
  • 정용숙, 『고려왕실족내혼연구』, 새문사, 1988.
  • 김기덕, 「고려시대 왕실의 구성과 족내혼」, 『국사관논총』 49, 1993.
  • 김성준, 「宗親府考」, 『사학연구』 18, 1964.
  • 남지대, 「조선초기 禮遇衙門의 성립과 배경」, 『동양학』 24, 1994.
  • 신명호, 「조선초기 왕실편제에 관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9.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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