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수(副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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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종친부 소속의 종4품 봉작명.

개설

종친을 대상으로 하는 봉작 제도가 정비되기까지는 조선이 건국되고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선 건국 직후인 정종 때에는 종친 중에서 기친(朞親)과 대공친(大功親) 즉 왕의 동성(同姓) 친족(親族) 중에서 4촌 이내가 봉작의 대상이었다. 태종 때에는 종친의 봉작이 왕의 손자까지로 명시되었다. 조선시대 종친의 봉작을 유교의 친족 조직에 근거하여 유복친(有服親) 이내로 확정한 왕은 세종이었다. 세종은 오복(五服)을 기준으로 하고 적서(嫡庶)를 고려하여 2품 이상은 윤(尹), 3품은 정(正), 4품은 령(令), 5품은 감(監), 6품은 장(長)으로 하였다. 이를 보다 세분화하여 세조는 정3품은 정, 종3품은 부정(副正), 정4품은 령, 종4품은 부령(副令), 정5품은 감, 종5품은 부감(副監), 정6품은 장으로 하였다. 후에 정4품의 령과 종4품의 부령을 정5품과 종5품으로 내리고 그 대신 정4품의 수(守)와 종4품의 부수(副守)를 신설하였는데, 이것이 『경국대전』에 실렸다. 『경국대전』 「이전(吏典)」 ‘종친부’ 조항에 의하면 부수는 품계(品階)로는 종4품, 종친계(宗親階)로는 봉성대부(奉成大夫), 광성대부(光成大夫)였다.

담당 직무

종4품의 부수는 왕의 서자(庶子)인 왕자군(王子君)의 중손(衆孫) 형제 가운데 천첩(賤妾) 출신, 왕자군의 중손 형제 가운데 양첩(良妾) 출신의 중자(衆子), 왕자군의 중손의 중자 형제 가운데 양첩 출신이 처음 받는 봉작이었다.

조선시대 왕의 4대 이내 즉 현손(玄孫)까지는 종친부의 봉작을 받는 대신 정치적, 사회적으로 제한을 받았다. 이는 왕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높은 왕의 유복친에게 최고의 명예와 부를 허락하는 대신에 벼슬살이와 정치 활동은 철저하게 금하여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에서였다. 부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특별한 직무가 있는 것은 아니고 명예직이었다. 단, 품계에 따라 녹봉이 지급되었다.

변천

1869년(고종 6) 1월 종친의 관제 개정 시에 부정·수·령·부령 등과 함께 폐지되었다. 대신 주부·직장·부직장·봉사·부봉사·참봉 등이 신설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성준, 『한국중세정치법제사 연구』, 일조각, 1985.
  • 정용숙, 『고려왕실족내혼연구』, 새문사, 1988.
  • 김기덕, 「고려시기 왕실의 구성과 근친혼」, 『국사관논총』 49, 1993.
  • 김성준, 「종친부고」, 『사학연구』 18, 1964.
  • 남지대, 「조선초기 예우아문의 성립과 정비」, 『동양학』 24, 1994.
  • 신명호, 「조선초기 왕실 편제에 관한 연구: ‘의친제’의 정착을 중심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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