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賜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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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제가 조선 왕의 상(喪)에, 혹은 조선의 왕이 사망한 신하나 신하의 사후 묘 등에 내리는 제사.

개설

조선 왕이 승하한 경우, 명나라에서는 예조인(禮曹印)이 찍힌 제문(祭文)을 든 사신과 제물 및 제찬(祭饌)을 준비할 두목(頭目) 등을 조선에 파견했다. 두목 등은 제찬을 직접 준비하였으며, 길일을 선택하여 사신이 직접 제사를 행했다. 제사 진행 절차는 일반 제사와 유사하나, 삼헌(三獻)을 연달아서 드리고 제문을 읽는다는 점이 다르다.

한편 조선 내부에서 신하들이 사망하면 왕이나 왕비가 근시(近侍)나 내시 등을 보내 사제하기도 하였고, 신하들의 사후 묘에 역시 사제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명나라 황제의 사제는 사신을 파견하여 대행토록 했다. 사제는 사시(賜諡)한 후 길일을 택해서 행해졌다. 사신들은 제사 전 3일 동안 치재를 행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술과 고기를 금하는 등 매우 엄격했다. 제찬은 두목 등이 직접 준비했다. 이때 사제의는 1408년(태종 8) 9월에 명나라 예부에서 보내온 사제의주를 참고하여 제정한 바, 『세종실록』 「오례」 흉례조에 규정된 그 절차는 대략 다음과 같다.

“길일 하루 전에, 자리를 설치한다. 당일에 왕과 종친 및 백관들은 혼전에서 곡을 한다. 그 직전에 분사(分司) 백관은 태평관으로 간다. 사자는 제문을 용정(龍亭) 안에 놓는다. 백관이 조복(朝服)을 갖추고서 말을 타고 앞에서 인도하며, 황의장(黃儀仗)과 고악(鼓樂), 제문용정(祭文龍亭), 뇌찬채여(牢饌綵輿), 사자가 차례로 따른다. 일행이 혼전 문밖에 이르면, 용정은 장전(帳殿)에 안치하고, 뇌찬여는 혼전에 들여놓는다. 인례(引禮)가 사자를 인도하여 좌차(座次)로 들어간다. 진찬(進饌)한다. 왕이 들어와 곡을 한다.

왕은 사자를 영접하고서 서문으로 먼저 들어가 서계 아래의 자리로 나아간다. 용정이 정문으로 들어오고, 사자가 뒤따라 들어온다. 왕과 종친 및 백관들이 국궁하였다가 평신한다. 용정이 전(殿)으로 오른다. 사자는 소복 차림으로 동쪽 계단으로 들어가서 부궤(賻匱)를 근정전 위에 놓고, 사자 중 한 사람은 제문을 가지고 또 한 사람은 시호와 고명을 가지고 들어가서 영전 앞 안(案) 위에 놓고 서쪽을 향해 선다. 왕은 최복 차림으로 서쪽 계단으로 올라가 전 서쪽으로 나아가서 동쪽을 향해 선다.

사자가 서서 향을 사르고 좨주(祭酒)하고서 연달아 3작(爵)을 드린다. 제문을 읽는 관원이 제문을 읽는다. 마치면, 제문을 요소(燎所)에서 불사른다. 왕이 대문 밖에서 사자를 배송(拜送)한다. 왕이 곡을 한다. 뇌찬을 거둔다. 환궁한다.”

이때 특징적인 점 중의 하나는 치제하는 사신이 상향하고 좨주하며 세 번 작을 드릴 때 모두 서서 행한다는 사실이다. 명나라에서는 꿇어앉는 예가 없다는 것이다. 제사는 반드시 혼전에서 거행하지 않고 편전이나 다른 장소를 정하여 행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제사 당일에 혼전에 모셔져 있는 우주(虞主)를 이안했다. 제사 음식 중에서 희생은 거세한 양과 돼지를 썼다.

조선 내부에서 행해진 사제는 그 대상이 왕실의 구성원인 종친을 비롯해 공주나 왕자, 혹은 대신이나 주요 인사 등이었다. 별도의 특별한 의식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변천

명나라 황제의 사제의 시기는 사신의 입국 날짜에 따라 달랐다. 졸곡 후인 경우가 대다수인데, 이때 우주의 사용 여부가 문제시 되었다. 우주에 쓰인 왕의 묘호와 시호가 사단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실제 임란 당시에는 왕의 묘호를 사용한 사실로 인해 말썽을 빚은 바 있었으므로 민감한 사안으로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확실치는 않지만 중종과 인종 이후로는 가주(假主)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가주는 가짜 신주로서 행사 하루 전에 글씨를 써서 탑전에 봉안하고 끝난 다음에 요여에 실어서 종묘의 북계에 매안하였다.

한편 조선 내부에서 왕이나 왕비가 사망한 왕실 구성원이나 신하들에게 사제하기도 하였다. 기록상으로는 1399년(정종 1) 10월 사망한 설장수(偰長壽)에게 사제한 것이 처음으로(『정종실록』 1년 10월 19일), 이후 1421년(세종 3) 7월에는 지신사김익정(金益精)으로 하여금 대신 사망 시 사제와 관련한 옛 제도를 상고해서 올리도록 한 바 있다(『세종실록』 3년 7월 20일). 이후 왕이나 중궁의 사제도 지속되었으며, 근시나 내시 등을 보내 사제하였다. 또한 왕의 능행이나 행행 시에 주변 지역에 위치한 대신이나 주요 인사들의 묘나 혹은 관련 서원, 사우 등에 사제하기도 하였다. 사제 시에는 부의를 전달하였다.

의의

이 제사는 각 의례와 형식을 통해 조선과 명의 예제적(禮制的) 사대 관계를 잘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시·사부와 아울러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 관계를 실제적으로 살피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선 내부에서 이루어진 사제는 군신 관계의 확인 및 이를 재확립하려는 왕의 정치적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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