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리(鄕吏)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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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향리 |
한글표제 | 향리 |
한자표제 | 鄕吏 |
관련어 | 서리(胥吏), 아전(衙前) |
분야 | 사회/사회구성원 |
유형 | 직역 |
집필자 | 최이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향리(鄕吏)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5년 5월 28일, 『세종실록』 18년 11월 15일, 『예종실록』 1년 8월 25일, 『세종실록』 11년 1월 6일, 『세종실록』 12년 1월 5일 |
조선시대에 향역을 지던 양인 최하층 집단.
개설
고려초의 향리(鄕吏)는 사회적으로 일정한 지위를 가지고 있던 대표적인 지방 세력이었으나, 고려말부터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에 따라 그 세력이 위축되고 역(役)이 고정화되면서 그 지위가 하락하였다. 특히 조선에서는 건국 초부터 속읍·속현을 폐지하여 군현화하고, 수령을 조롱하거나 백성의 토지를 빼앗는 등의 향리 행위에 대한 구체적 처벌법인 원악향리처벌법(元惡鄕吏處罰法)을 시행하면서 향리의 지위는 더욱 축소되었다. 결국 향리는 양인의 하층 신분으로 그 지위가 고정화되어 갔다.
향리는 향역(鄕役)과 기인역(其人役) 등 고단한 역을 감당하였으나 향직을 맡는 경우는 향촌 행정의 하위 담당자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향리의 처지는 고단한 것이어서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향역을 면하고자 노력하였다.
담당 직무
일반 향리의 경우 고단한 역을 담당하였으나, 향직을 담당하는 향리의 경우 지방 행정에 참여하였다. 향리는 중앙의 육조(六曹) 조직을 모방하여 이·호·예·병·형·공방(吏·戶·禮·兵·刑·工房)으로 나뉘어 그 직무를 분담하였다. 향리는 아전이라 불리면서, 지방관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향리는 농민 위에 군림하여 착취하는 부패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
변천
고려에 비하여 조선에서의 향리 지위는 매우 위축되었다. 조선초기 향리가 위세를 부리는 모습은 『조선왕조실록』에 가끔 나타난다. 1406년(태종 6) 품관과 향리들이 전토를 널리 점령하고 유망인(流亡人)을 불러들여 병작(竝作)하여 그 반을 거두니, 그 폐단이 사전(私田)보다도 심하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1423년(세종 5)에는, 각 관청의 향리 가운데 조상 때부터 그 임무가 전래되어 백성들이 수령보다도 더 무서워하는 자가 있으니 간리(奸吏)들을 추핵(推覈)하는 법을 세워서 백성들을 좀먹는 폐단을 막게 하자는 기록도 보인다(『세종실록』 5년 5월 28일). 이처럼 조선초기에도 일부의 향리는 위세를 부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향리가 향직을 맡으면서 향촌의 행정에 관여하는 경우에 국한되었다. 향리의 자손이 그 역을 피하려고 다른 고을에 도망가서 산다는 기록은 향리의 어려운 형편을 잘 보여 준다(『세종실록』 18년 11월 15일). 향리는 역을 피하기 위해서 관노(官奴) 등과 함께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향직을 맡지 못한 향리들의 처지가 고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향리가 향직을 바탕으로 부리는 위세는 국가의 규제 대상이었다. 1423년에 만들어진 ‘간리추핵지법(奸吏推覈之法)’과 이를 이은 『경국대전』의 원악향리(元惡鄕吏) 처벌 규정은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러한 규제로 향리의 지위는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향리의 법적 지위는 양인보다 취약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향리는 국가에 공을 세워 포상을 받는 경우에도 양인에 비해서 차별 대우를 받았다. 예종대의 규정으로 도적을 잡는 경우 양인은 2계급을 뛰어 올려 관직을 제수하고, 향리와 역리(驛吏)는 신역(身役)을 면제하라고 명하고 있어 향리가 역리와 함께 양인보다 낮은 대우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예종실록』 1년 8월 25일). 따라서 향리는 복색도 양인과 구분되었다. 향리는 양인이 쓰는 두건을 쓰지 못하였고 방립(方笠)을 쓰게 하였다. 향리는 역(役)을 대대로 물려주었다. 향역이 고단하여 향리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빠져나가려고 하였으므로 향리의 수가 부족했고 이 때문에 외손으로까지 직역(職役)을 잇게 하였다. 또한 2대를 연달아 향역을 진 사람은 향역을 물려주도록 국가에서 규제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1년 1월 6일).
향리는 그 직역을 세습하였지만 직역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향리가 그 직역을 벗어날 수 있는 경우는 몇 가지의 상황에서 가능하였다. 공을 세우거나, 3정1자(三丁一子)로 서리가 되어서 거관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서 향리는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다(『세종실록』 12년 1월 5일). 여기서 3정1자란 향리 1호(戶)에서 세 아들이 한꺼번에 역(役)을 담당하면 나라에서 그 중에 한 아들의 역을 면제해 주던 것을 말한다. 향리가 역을 면제받아 향역을 벗어난 이후에는 과거에도 응시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향리의 기본적인 지위는 조선후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참고문헌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수건, 『한국 중세 사회사 연구』, 일조각, 1984.
- 이훈상, 『조선 후기의 향리』, 일조각, 1990.
- 이성무, 「조선 초기의 향리」, 『한국사연구』5, 1970.
- 이수건, 「조선조 향리의 일연구: 호장(戶長)에 대하여」, 『(영남대학교)문리대학보』3, 1974.
- 최이돈, 「조선 초기 향리의 지위와 신분」, 『진단학보』11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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