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리(驛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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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역참에서 제반 업무를 담당한 아전.

내용과 특징

역리(驛吏)는 왕명이나 문서를 전달하는 ‘전명(傳命)’이라는 역(役)을 담당한 역민(驛民)의 하나로, 지방 이서층(吏胥層)에 해당하였다. 이들은 지역에 따라 달리 불렸는데, 하삼도에서는 역리라 하였고, 평안도 지방에서는 관군(館軍), 황해도 및 함경도에서는 참리(站吏)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대다수의 역리는 고려의 역정호(驛丁戶) 또는 역리가 존속 또는 계승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말선초의 사회 변동기에 새 왕조의 정책을 반대한 무관이나 원악향리(元惡鄕吏)를 역리로 귀속시키기도 하였다. 또 사화(士禍)로 화를 입거나 죄를 지은 사족 가운데 일부가 역리로 정속(定屬)되는 경우도 있었다.

역리는 역리 호적에 오른 역호(驛戶)로서 대대로 세습되었다. 1424년(세종 6) 7월에 경기좌도 정역찰방(程驛察訪)의 건의에 따라, 소속된 역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성명과 나이, 사조(四祖)와 외조(外祖) 및 처의 성명·나이, 솔정(率丁) 등을 기재하여 역리 호적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병조와 감영, 군현 및 본역에 보관하고, 3년마다 도망자와 사망자, 입역 대상자 등을 파악하여 역리를 확보하도록 하였다.

역리의 임무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로는 왕의 명령인 전명 및 공문서의 전달과, 감사를 포함한 수령의 교체에 따른 영송 및 접대를 들 수 있다. 둘째, 왕명을 전달하는 사신 및 외국을 왕래하는 사신들의 짐[卜物]과 각종 진상품을 운반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셋째, 공용 역마를 길러 바치는 일을 담당하였다. 역리들은 지급받은 마위전(馬位田)을 경작하여 거기서 얻은 재원으로 말을 사육해 입대시켰는데, 말 값이 오를 경우에는 가산을 탕진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다. 조정에서 목장마를 나눠 주거나 향리를 조역(助役)으로 차정하는 조역정책(助役政策)을 실시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넷째, 변방의 요충지에 위치한 역에서는 군사 임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왜구의 출몰이 잦았던 삼척옥원역(沃原驛)의 경우, 1412년(태종 12) 12월에 근처에 있는 용화역(龍化驛)의 역리까지 방어에 동원됐다. 역리는 잡색군에 편성될 뿐만 아니라 부방군(赴防軍)에도 충군되었다. 함경도수성역(輸城驛)의 경우, 역리와 역졸(驛卒)을 작대(作隊) 즉 부대로 편성하여 수령의 친병(親兵)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처럼 역리는 많은 일을 담당하였는데, 특히 역역(驛役)과 군역의 이중고로 인해 유이(流移), 도산(逃散)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1473년(성종 4)에 병조는 역리를 군역에 차출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다양한 역로 소복책과 역리 부성책을 강구하였다. 당시에 제시된 역리 부성책은 ① 각 도의 역리를 잡색군에 충원하지 말 것, ② 역리 또는 역녀와 혼인한 공천(公賤) 소생은 역에 소속시켜 입마하게 할 것, ③ 역리와 일수(日守)의 잡역을 면제할 것, ④ 역리와 동거하는 매부나 사위 중 자원하는 자를 역에 소속시켜 입마하게 할 것, ⑤ 조역인은 한역(閑役)한 사람으로 충당할 것, ⑥ 양전(量田)할 때 군자에 속한 잉여 마위전을 역에 환급할 것, ⑦ 도망한 역리는 장 100대에 처하고 도망 역리를 숨겨 준 자는 양인일 경우 잔역리(殘驛吏)로 충원하고, 노비[公私賤口]일 경우 장 100대를 치고 중노동 형벌[徒刑]을 3년간 부과할 것, ⑧ 관찰사가 도망한 역리나 쇄환(刷還)된 역리를 철저히 점검할 것 등이었다(『성종실록』4년 5월 10일).

조선후기에 이르러 역리의 입마역은 마호입마제(馬戶立馬制), 역마고립제(驛馬雇立制)로 점차 대체되었고, 실무 행정의 분화와 더불어 입역 형태도 변화되었다. 진주 소촌역(召村驛)의 경우, 이른바 6방분임(六房分任)에 따라 역리가 이방색(吏房色), 병방색(兵房色), 호방색(戶房色), 예방색(禮房色) 등으로 구분되어 실무를 나누어 담당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방은 본·외역의 역리와 역졸로부터 신공전을 수납하고, 신관과 구관의 영송 및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진배(進排)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호방은 공수전을 관리해 쌀과 콩을 거두고 역민으로부터 역에 필요한 물품을 징수했으며, 마위전·복호전을 관리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또 예방은 삭전(朔錢)과 수요품의 조달을, 병방은 역참에 필요한 도구를 구입하는 비용과 왕래하는 사객의 인마기세(人馬騎貰) 및 복세전(卜貰錢)을 마련하는 일, 왕이 능행할 때 역마를 입대하는 일과 마적(馬籍)을 관리하는 일 등을 맡았다. 대동색과 관청색은 본역대기(本驛垈基)에서 콩을 징수하여 역마를 기르고 대동고(大同庫)를 관리하며, 찰방의 월급과 성정미(詳定米)의 대전(代錢)을 수납하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형방은 각종 문부(文簿)를 수보(修報)하는 일을, 승발(承發)은 문첩(文牒)을 수보하며 전관(傳關) 등을 담당하였다.

역리는 대체로 양인(良人) 신분이었으며, 과거나 군공(軍功)을 통해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또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이들에게는 장전(長田) 2결과 부장전(副長田) 1결 50부씩이 역리위전(驛吏位田) 등으로 지급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역리를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해 주는 복호(復戶)로 인정하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역리의 수가 늘어나고 역역이 분화되면서, 이신응역(以身應役)하는 입역역리(立役驛吏)와 신공전(身貢錢)을 납부하는 납공역리(納貢驛吏)로 나뉘어 교대로 근무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산거(散居)하여 일반 평민들처럼 잡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특히 16세기 이후부터는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역리가 도망하는 경우가 잦아졌고, 관노비가 역리로 신분을 상승시키는 역노승리법(驛奴陞吏法)의 시행 및 양인의 사천화(私賤化), 역리의 노비 전락 등의 신분 변동이 일어났다. 심지어는 공천(公賤)·사천(私賤)을 역리로 충원함으로써 역리와 역졸 간의 신분 혼동마저 초래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연조귀감(掾曹龜鑑)』
  • 『연조귀감속편(掾曹龜鑑續編)』
  • 『호남역지(湖南驛誌)』
  • 『관서역지(關西驛誌)』
  • 『만기요람(萬機要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반계수록(磻溪隨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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