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사(紵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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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풀 껍질로 만든 실과 명주실을 섞어서 짠 겸직포(兼織布).

내용

저사(紵絲)는 각각의 실의 물리적 성질로 보아, 명주실을 날실로 하고 모시풀 껍질로 만든 실을 씨실로 해서 짰을 가능성이 크다. 저사가 겸직포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는 1478년(성종 9) 12월의 기사에 기록되어 있는 “白細苧布(백세저포) 苧絲兼織布(저사겸직포)”라는 문구이다(『성종실록』 9년 12월 21일). 이 문구의 앞에 나오는 저포(苧布)는 모시포를, 후자의 저포는 여름철 옷감에 주로 사용되었던 저사인 것이다.

저사는 옷감 이외에도 관(冠)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조선초기 명나라로부터 받은 하사품 중에는 저사가 상당량 포함되어 있었는데, 1393년(태조 3 2) 6월에도 중국은 조선과의 9,880필의 말[馬] 무역에 대한 대가로 말 1마리당 저사 1필씩과 면포 1필을 지불함으로써 당시 9,880필의 중국산 저사가 조선으로 들어왔다(『태조실록』 2년 6월 6일). 이렇듯 당시 조선 왕실에서 사용되던 저사는 거의 중국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왕은 상사(商社)로 받은 저사를 신하들에게 1~2필씩 하사하기도 하였다.

저사의 용처를 보면, 여연(轝輦)과 거여(車轝)에 각색의 저사가 사용되었고, 대렴(大殮)할 때 시체를 싸는 쇄(殺)는 초록 저사를 썼다. 습신은 모두 저사로 만들었으며, 천전의(遷奠儀)에 왕의 규(圭) 주머니 역시 청저사(靑苧絲)가 쓰였다. 이외에도 왕의 적석(赤舃)은 붉은 빛깔의 저사로 지었다. 1504년(연산군 10)에는 중국의 저사와 같은 옷감을 조선에서도 짜기 위해, 직조를 맡은 관원이 능단장(綾緞匠)과 화원(畫員)을 거느리고 저사를 짤 실을 별도로 염색하여 다섯 가지 채색을 가지고 들라는 전교가 내려졌다(『연산군일기』 10년 5월 16일). 그리하여 이후로 중국의 무늬와는 다른 화문(花紋)·소운문(小雲紋)·사양화문(四樣花紋)의 저사를 조선에서도 짜기 시작하였다.

용례

白細苧布 苧絲兼織布(『성종실록』 9년 12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