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전의(遷奠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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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상 때 발인을 거쳐 재궁(梓宮)이 능지(陵地)에 도착하면 영장전(靈帳殿)에 모시고, 매장하기 전에 전(奠)을 올리는 의례.

개설

국장(國葬)에서는 관을 재궁, 관을 묻기 위해 파놓은 구덩이 즉 일반적인 장례에서 광중(壙中)이라 부르는 곳을 현궁(玄宮)이라 하고, 재궁을 현궁으로 내려 보내는 길을 연도(羨道)라고 칭한다. 재궁이 능지에 도착하면 현궁에 내리기 전까지 보관하고 의례를 거행하기 위해 충호위(忠扈衛)에서 미리 설치한 장막이 영장전이다.

천전의는 재궁을 현궁에 내리기 전에 영장전에서 올리는 전(奠)이다. 예찬은 탁자에 4줄로 진설한다. 첫째 줄에는 밀가루 반죽에 꿀 등을 넣고 모양을 낸 뒤 기름에 지진 유밀과인 중박계(中朴桂) 4그릇, 둘째 줄에는 찹쌀가루에 술을 넣고 만든 유과류인 홍백산자(紅白散子) 5그릇, 셋째 줄에는 약과 5그릇, 넷째 줄에는 각색 실과(實果) 6그릇을 놓고, 면(麵), 병, 국 12그릇을 좌우에 진설한다. 영좌 바로 앞에 협탁(俠卓)을 놓고 각색 채소, 실과, 면, 국 등과 잔 3개를 4줄로 진설한다.

연원 및 변천

조선초기에는 천전의를 임광전(臨壙奠)(『세종실록』 1년 12월 22일)이라고 칭했는데, 세종대에 송(宋)의 제도에 따라 천전(遷奠)이라 칭하였고(『세종실록』 2년 9월 9일) 이후 계속 그렇게 쓰였다. 구체적인 절차는 의례를 행하기 1일 전에 영장전과 왕과 대군 및 신하 등이 사용할 장막 및 자리를 설치하고, 당일에 영장전에서 전을 올리고, 연도에서 재궁이 내려가는 가는 것을 보며 곡하고, 재궁을 현궁에 내리면 현궁 위를 흙으로 덮은 뒤에 토지신인 후토(后土)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절차는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크게 변하지 않고 수행되었다. 다만, 관서 제도의 변화에 따라 충호위에서 하던 일을 전설사(典設司)에서 담당하거나 집사자의 명칭이 변하는 등의 차이가 있었다. 또한 1441년(세종 23)에 행한 천전의 절차에는 3번 향을 올리고 차를 땅에 부어 강신하는 뇌다(酹茶)의 절차(『세종실록』 23년 9월 14일)가 있었으나 『세종실록』 「오례」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등에는 이런 절차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절차 및 내용

의례를 행하기 1일 전에 충호위에서 입주전(立主奠)을 행할 길유궁을 영장전의 서쪽에 남향으로 설치한다. 액정서(掖庭署)에서 왕의 자리를 영장전 유문(帷門) 안 동쪽에 서향으로, 전의(典儀)가 대군 이하의 자리를 왕의 자리 뒤편에 서향으로 설치한다. 종친과 문무백관의 자리는 유문 밖에 설치한다. 감찰(監察) 2인의 자리는 문·무반 뒤에 북향으로, 전의, 통찬(通贊), 봉례랑(奉禮郞)의 자리는 문관의 북쪽에 동향으로 설치한다. 액정서에서 왕의 봉사위(奉辭位)를 연도의 동남쪽에 서향으로, 전의가 대군 이하와 종친 및 문무백관 그리고 집사자의 자리를 설치한다. 충호위에서 재궁을 안치할 장막을 현궁의 문 밖에 남향으로 설치한다. 관원 중 담당자인 유사(攸司)가 자리를 장막 안에 설치하고 대관(大棺)을 그 위에 놓고 휘장을 친다. 영의정(領議政)이 옥백(玉帛)을 올리는 자리는 장막의 동쪽에 서향으로 설치하고, 애책(哀冊)과 옥백을 들고 있을 관원의 자리를 영의정의 자리 뒤에 서향으로 설치한다. 영장전의 유문 밖에는 길의장(吉儀仗), 흉의장(凶儀仗), 거여(車輿), 명기(明器) 등을 발인의(發引儀) 때와 같이 늘어놓는다. 명기는 무덤에 재궁과 같이 묻기 위해 실제보다 작게 제작한 물품이다. 유사가 예찬을 올리면 내시(內侍)가 받아 명주나 모시로 접어 만든 신주인 혼백(魂帛)을 안치한 영좌(靈座) 앞에 진설한다. 3번 향을 올릴 때 사용하는 향로, 향합, 초를 예찬 앞에 진설하고, 축문은 영좌의 왼쪽에 올린다. 잔을 올릴 때 사용하는 술이 든 술동이는 영장전의 동남쪽에 북향으로 설치하고 잔 3개를 놓아둔다. 재궁을 현궁에 내리기 전에 악귀를 쫓는 사람인 방상씨(方相氏)가 먼저 현궁으로 들어가 창으로 사방 모퉁이를 쳐 사악한 기운을 막는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감찰, 전의, 통찬, 봉례랑이 정해진 자리로 나아간다. 종친과 문무백관, 대군 이하의 순으로 자리에 나아가면 왕이 판통례(判通禮)의 인도로 지팡이를 짚고 자리로 나아간다. 판통례의 외침에 따라 왕이 엎드려 곡하면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자리에서 엎드려 곡한다. 또 판통례의 외침에 따라 왕이 곡을 그치고 일어나 4번 절하면 다른 사람도 곡을 그치고 일어나 4번 절한다. 통찬의 말에 따라 모두 자신의 자리에 꿇어앉고 대전관(代奠官)향안(香案) 앞에 나아가 3번 향을 올리고, 술잔을 3번 연속하여 영좌 앞에 놓는다. 대축(大祝)이 영좌의 왼쪽으로 나아가 서향하여 꿇어앉아 축문을 읽는다. 판통례의 외침에 따라 왕이 곡하다 그치면 대군 이하도 곡하다 그친다. 왕은 곡을 그치고 4번 절한 후 임시 거처인 악차(幄次)로, 대군 이하는 막차로 나간다. 유사가 예찬을 거두고 축문을 구덩이에 묻는다.

섭판통례(攝判通禮)가 영좌 앞에 나아가 연(輦)에 오르라고 말하고 물러간다. 대축이 혼백함(魂帛函)을 여(輿)에 안치하고 혼백함 뒤에 있던 우주를 담은 함인 우주궤(虞主櫃)는 혼궁이 흙으로 덮이면 입주전을 행하기 위해 길유궁으로 옮긴다.

재궁이 옮겨질 때에는 삽(翣)으로 가려 노출되지 않도록 한다. 왕 이하 모두 연도 주변에 설치된 자신의 자리로 나아가 곡을 하며 재궁이 현궁으로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다 4번 절하고 일어나 왕은 악차로, 대군 이하는 막차로 들어간다. 일이 끝나면 서운관(書雲觀)의 관원이 토지신인 후토(后土)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후 발인과 하현궁에 사용했던 기물 중 일부는 불태운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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