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사(典設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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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행행이나 왕실 의례를 거행할 때 의식(儀式)의 준비를 담당하던 관서.

개설

전설사는 조선전기부터 말기까지 국가와 왕실의 의례를 거행할 때 행사장의 설치와 기물의 운반을 주관하도록 설치한 관서이다. 행사를 거행할 장소에서 악차(幄次)의 위치는 물론 왕과 왕족이 자리할 방위까지 사전에 책임졌다. 종묘와 사직의 제사, 능침과 사당의 제사, 왕과 왕족의 결혼과 장례에 이르기까지 국가와 왕실의 의례를 준비하였다. 또한 전설사 관원은 궁궐 내에서의 행사 장소 외에도 왕이 도성 내·외부로 행행할 때에도 따라가 임시 건물을 설치하였다. 왕이 잠시 쉬면서 다음 의식을 준비하는 소차(小次), 대차(大次)에서 식사를 하거나 숙박을 하는 주정소(晝停所)·행궁(行宮)을 설치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전설사라는 명칭은 조선초기부터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설사 고유의 기능은 조선초기 태종대 충순호위사(忠順扈衛司)에서 시작되었다. 충순호위사는 1414년 충호위(忠扈衛)로 개편되었으며, 세조대인 1466년(세조 12) 정4품의 수(守) 1명을 두고 전설사로 개칭하면서 조선말기까지 유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전설사의 기능은 왕실 행사의 준비와 거행이 목적이었으므로 전설사는 조선이 건국하면서 그 임무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전설사라는 명칭은 세조대에 생긴 것이며, 설립 목적은 국가 의례부터 왕실의 사적인 행사에 이르는 의식 거행의 사전 준비였다. 예컨대 성종대인 1475년(성종 6) 향선농의(享先農儀) 의식의 진설(陳設)을 보면, 제향 3일 전에 전설사에서 대차를 동쪽 유문(壝門) 밖에다 길 북쪽에 남향하여 설치하였다. 시신(侍臣)의 막차(幕次)는 대차의 뒤에 남향하여 설치하며 제향관(諸享官)의 막차는 재방(齋坊)의 안에, 배향관(陪享官)의 막차는 그 앞에 땅의 형편에 따라서 북향하여 설치하였다. 2일 전에는 찬만(饌幔)을 동쪽 유문 밖에 설치하였다. 장례의 경우, 전설사에서는 재궁(梓宮)을 안치할 장막[幄]을 현궁(玄宮)의 문 밖에 남향하여 설치하였고 둘레에는 휘장[幄]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전설사는 국가 행사와 의례가 다양해지는 조선후기로 갈수록 그 기능과 임무가 다양해졌다. 1681년(숙종 7)에는 정종을 추숭하면서 전설사에서 1일 전에 신주를 쓸 장막을 전월랑(殿月廊)에 설치하였다. 공정대왕(恭靖大王)과 정안왕후(定安王后)의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올리고 신주(神主)를 고쳐 쓰는 의식을 위해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설사의 문제점이 나타났다. 예컨대 세조대인 1467년 행사 전날 위장(圍帳)과 포진(鋪陳)을 마련하게 하였는데 확인해 보니 누락되어 있었다. 1468년 비가 오는 가운데 행사를 치렀는데 설치한 장막에서 비가 새는 곳이 많았고 설치하지 않은 곳도 있었다. 1475년에는 능행 시 왕의 가마가 막차에 내리지 않고 지나가게 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으며, 전설사의 차일장(遮日帳)이 국용(國用)인데도 관원이 사사로이 서로 빌려주어 파손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전설사 관원이 오류를 범하는 경우에는 의금부에서 추론했다. 또한 장막을 잘못 설치한 경우 해당 관리인 전설사 별좌(別坐)장(杖) 70대에 처하고 충군(充軍)하게 하기도 했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전설사에는 왕이 친림(親臨)하여 친국(親鞫)을 하거나 향민(鄕民)을 불러 농사의 형편을 물어보거나, 능에 행차하기 전에 재숙(齋宿)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영조의 경우 이런 경우가 잦았는데, 1773년(영조 49)에는 전설사 관사에 희우랑(喜雨廊)이라는 편액을 하사하기도 했다.

조직 및 역할

1699년 아문(衙門)과 군문(軍門) 소속 서울과 지방의 양역(良役) 정원을 결정할 때 전설사의 인원이 조정되었다. 전설사의 인원은 각 도와 각 고을의 크기에 따라 정원을 정하고 별도로 문서를 만들어 전설사와 해당 지역에 각기 1부씩 비치하도록 하였다. 그 문서의 정원에 따라 영구히 임의로 증가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조정된 전설사의 양역 정원 수는 648명에서 148명을 감한 500명이었다. 지방의 경우, 강원도는 261명에서 50명을 감한 211명, 황해도는 223명에서 42명을 감한 181명, 충청도는 34명에서 15명을 감한 19명, 전라도는 70명에서 10명을 감한 60명, 경상도는 42명에서 31명을 감한 11명이었다.

1840년까지도 전설사에는 창고가 없었다. 당시 비변사에서는 서울에 있는 각 사(司)에서 보관하는 전(錢)·미(米)·포(布)·목(木)을 조사했는데, 이때에도 전설사에는 창고가 없었다. 그래서 선혜청에서 남은 것 중에서 지급하고 해마다 선혜청에 덜어 남겨 두었다.

1811년 효명세자가 탄생했을 때에는 원자궁(元子宮)의 보덕청(輔德廳) 당후(堂后)를 선전관청(宣傳官廳)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면서 선전관청은 전설사로 옮겨서 거주하도록 하였고, 전설사는 감인소(監印所)로 옮겨 거주하였다. 따라서 전설사는 고정된 곳에 장기간 설치된 관서는 아니었다.

변천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궁내부(宮內府), 종정부(宗正府), 종백부(宗伯府)의 관제를 올리면서 전설사가 개편되었다. 종백부에서는 제사 의식과 시호(諡號)를 의논하는 일을 맡았는데, 이때 전설사의 기능을 흡수하면서 전설사는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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