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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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군국기무처 |
한글표제 | 군국기무처 |
한자표제 | 軍國機務處 |
상위어 | 의정부(議政府) |
하위어 | 총재(總裁), 부총재(副總裁), 의원(議員) |
관련어 | 의안(議案), 교정청(校正廳), 갑오개혁(甲午改革)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고종 |
집필자 | 왕현종 |
폐지 시기 | 1894년(고종 31)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
1894년 6월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던 의정부 산하의 국정 최고 의결 기관.
개설
1894년 6월 조선의 중앙 행정·사법을 비롯하여 국정 전반과 식산흥업(殖産興業) 등의 개혁을 결의하는 기구로 군국기무처가 설립되었다. 회의원은 총재·부총재·의원 10인 이상 20인 이하, 서기관 혹은 기초위원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김홍집총재관을 비롯하여 박정양, 민영달, 김윤식 등 중견 대신과 소장 개혁 관료층이 참여하였다. 군국기무처는 조선의 권력 기구와 관료 제도의 개편에 착수하여 의정부와 궁내부, 8아문 체제로 개편시켰다. 또한 각종 사회 신분제의 폐지와 선거 조례, 조세 제도의 개혁 등 많은 개혁 법령을 심의·공포하였다. 그러나 1894년 11월 일본의 간섭에 의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94년 6월 21일, 양력 7월 23일 일본은 조선 정부를 장악하고 청과의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경복궁을 점령하고 정권을 교체시켰다. 고종을 대신하여 흥선대원군에게 국정을 맡기면서 6월 25일 김홍집을 중심으로 군국기무처를 구성하게 하였다. 6월 26일 공포된 「군국기무처장정(軍國機務處章程)」에 의하면, “군국기무(軍國機務) 일체(一切) 경장지처(更張之處)”라 하였다. 즉, 군국기무처는 중앙의 행정·사법 기구를 비롯하여 국정 개혁, 식산흥업 등 국정 전반에 걸쳐 개혁을 기안하고 의결하는 기구였다.
주한 일본공사관 서기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는 군국기무처를 평의회로 운영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하였다. 군국기무처의 명칭은 1882년부터 1883년까지 존속하였던 기무처(機務處)에서 딴 이름이다.
군국기무처는 4개월여 동안 약 210건의 개혁 법령을 심의·공포하였다. 군국기무처의 운영은 실제 조선의 개혁 관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에 몰두하여 조선 내정에 소극적으로 간섭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군국기무처는 자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다수이다.
조직 및 역할
군국기무처의 구성원은 주로 대다수의 개혁 관료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회의원 규정에 따라 총재 1명, 부총재 1명, 의원 10명 이상 20명 이하, 서기관 2명 혹은 기초위원 3명으로 되어 있다. 1894년 6월 25일 판중추부사김홍집은 군국기무처의 총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회의원으로 내무독판(內務督辦)박정양(朴定陽), 협판(協辦)민영달(閔泳達), 강화유수(江華留守)김윤식(金允植), 내무협판김종한(金宗漢) 등 비중 있는 고위 관료가 임명되었다. 그 외에도 회의원으로는 장위사(壯衛使)조희연(趙羲淵), 대호군(大護軍)이윤용(李允用), 외무협판김가진(金嘉鎭), 우포장(右捕將)안경수(安駉壽), 내무참의(內務參議)정경원(鄭敬源)·박준양(朴準陽)·이원긍(李源兢)·김학우(金鶴羽)·권형진(權瀅鎭), 외무참의(外務參議)유길준(兪吉濬)·김하영(金夏英), 공조(工曹) 참의(參議)이응익(李應翼), 부호군(副護軍)서장집(徐相集) 등 18명이 있었다. 1894년 7월 2일에는 선혜청 당상어윤중(魚允中), 이조 참의이태용(李泰容), 내아문 참의권재형(權在衡)이 새로이 의원으로 들어왔다. 8월 22일에는 이도재(李道宰), 신기선(申箕善), 우범선(禹範善) 등이 추가로 임명되어 모두 24명이 회의원을 역임했다. 서기관직은 유정수(柳定秀), 오세창(吳世昌)이 맡았다.
군국기무처의 구성원 중에는 대외 교섭을 담당하던 중견관료인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박정양 등이 있었다. 이들은 1880년대 초반 일본에 가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성과를 조정에 보고했던 조사시찰단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1880년대 후반 청의 종주권 강화와 민씨 척족의 득세 등으로 인하여 정권에서 일시적으로 소외되었다.
군국기무처의 여러 소장·개혁 관료들은 대개 30대 후반으로 1880년대 대외 개방과 근대화 정책 관련 부서에서 양성된 관리들이었다. 유길준은 다년간 일본과 미국에서 서구의 학문을 공부하고 돌아와 8년간이나 자신의 개혁 구상을 가다듬고 있었다. 김가진, 정병하, 김학우 등은 전환국, 화약국, 목축장, 영학교, 제중원, 광무국 등 신설 아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관료층이었다.
군국기무처 의원 중 문·무과 출신자가 14명으로 과반수를 차지했다. 소장·개혁 관료 중에는 양반의 서자(庶子)들이 많아서 군국기무처 의원 20명 중 적어도 12명이 서자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들은 집권 양반 관료층 내에서 ‘주변인’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한국 학계에서는 군국기무처의 주도 세력을 ‘갑오개화파’로 부르거나 조선 정부의 ‘주도적 관료, 소수의 양심적이며 선진적인 관료 집단’, 혹은 ‘개혁 관료’ 등으로 부르고 있다. 북한 학계에서는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혁신 관료’라는 용어로 통칭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갑신정변 이후 개혁 주도 세력으로 등장한 관료들로서 당시 개혁의 혁신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군국기무처가 관장하는 업무는 중앙의 행정·사법 기구를 비롯하여 지방 제도, 조세·화폐 제도, 학사, 군사, 식산흥업 등이었다. 즉, 군국기무처는 국가 운영의 전부를 담당하는 의결 기구로 규정되었다. 이 기구의 특이한 점은 의사 결정 방식에서 다수결 원칙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의사를 결정할 때 가부 다수결로 결정하되 상반된 의견의 수가 같을 경우에만 의장이 결정하였다. 다수결의 원칙은 군국기무처 내 회의원 간에 이견을 조정하고 신속한 결정을 내리기 위한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군국기무처는 6월 28일부터 조선왕조의 권력 기구와 관료 제도의 개편에 착수했다. 의정부와 궁내부를 비롯하여 외무, 내무, 탁지, 군무, 법무, 공무, 학무, 농상 아문 등 8개 아문이 개설되었다. 각 아문의 관제 규정과 후속 인사들은 6월 28일부터 7월 20일까지 마무리하여 확정하였다. 군국기무처는 새로운 의정부 관제에서 의정부 산하 기관이었으나 여전히 정부의 각종 부서 개편과 개혁 정책을 담당하여 심의·의결하는 등 의회적인 기능을 갖고 있었다.
군국기무처는 6월 28일 양반과 상·천민이라는 신분적 차별 제도를 폐지하고 귀천에 구별 없이 인재를 채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또한 과부의 재혼 허용, 공·사노비의 혁파, 인신매매의 금지 등 신분제를 폐지하는 정책을 공포하였다. 7월 2일에는 양반의 상업 경영의 자유화를 선언하였다. 7월 3일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따로 선거 조례를 제정하여 양반 이외의 능력 있는 인사도 권력 참여를 허용할 것을 표명했다. 7월 10일에는 조세 제도를 개혁했다. 그동안 지방에서 각종 잡세와 부세가 증가하여 각종 부패와 폐단이 쌓였는데, 부세 항목을 간소화하고 조세의 금납화를 추진하였다. 7월 12일에는 향회를 설치하여 지방민의 권력 참여를 제도화시키려고 하였다. 이러한 군국기무처의 사회 개혁 의안은 1차 농민전쟁에서 제기된 농민들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7월 11일에는 「신식 화폐 발행 장정」을 시행하여 이전의 통화 유통 혼잡을 없애고 은(銀)을 기본으로 하는 근대적 화폐 제도를 추구하였다. 그렇지만 백동화의 남발이나 일본 화폐의 통용으로 화폐 유통의 폐단을 야기하였다. 8월 26일에는 국내의 토지, 산림, 광산을 외국인에게 팔거나 외국인이 점유하는 것을 금지했다. 일본의 산업 기반 시설인 철도·전신·항만의 건설 등의 강요도 용인하지 않으려고 했다.
변천
군국기무처는 6월 말에서 7월 초까지 전반적인 사회 개혁의 의지를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8월 초순 이후 개혁 정책의 후속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못하였다. 노비의 해방도 지방의 사정에 따라 처리하게 하였고, 10월부터 시행이 예정된 조세 제도의 방안도 확정하지 못하였다. 또 군국기무처 내부에서도 흥선대원군 계열의 관료와 김홍집, 유길준 등 개혁 관료들 사이에 여러 사안에 대해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더욱이 일본은 청일전쟁 중이라 조선의 내정 개혁에 간섭하지 못하다가 1894년 8월 중순 평양성 전투의 승리 이후 개입 정책과 친일 세력의 확대를 시도했다. 일본은 이미 친일 내각의 핵심 인물인 박영효, 서광범 등 갑신정변 개화파 망명 정치인들을 귀국시켜 정권에 참여시키려고 하였다. 또한 강경한 개입 정책을 위해 주한 일본공사의 교체도 고려하였다.
일본 정부의 내각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894년 9월 28일, 양력 10월 28일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신임 주한 일본공사로 임명하였다. 이노우에는 새로운 개혁의 원칙으로 내정 개혁 20개 조항을 제출하면서 내정 간섭을 강화하였다.
한편 군국기무처는 나름대로 독자적인 역할을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1894년 9월 11일 군국기무처를 의정부에서 분리하여 독립된 입법 기구로 개혁할 것을 의결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에 농민군의 2차 봉기가 일어나고 일본의 간섭 정책이 강화되면서 군국기무처는 존폐의 위기에 빠졌다. 마침내 1894년 11월 21일 일본은 군국기무처가 의정부와 각 아문을 능가하는 역할을 하여 국정을 문란케 한다는 명분으로 군국기무처를 폐지시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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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성록(日省錄)』
- 『매천야록(梅泉野錄)』
- 『경장장정존안(更張章程存案)』
- 『공문편안(公文編案)』
- 『의안(議案)』
- 『비서원일기(秘書院日記)』
- 『훈령편안(訓令編案)』
-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 『속음청사(續陰晴史)』
- 『의안(議案), 칙령(勅令), 조칙(詔勅)』
- 『주의·주본(奏議·奏本)』
- 『의주(議奏) 칙령(勅令)』상(上)
- 『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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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杉村濬, 『明治二十七二十八在韓苦心錄』, 勇喜社, 1932.
- 伊藤博文, 『秘書類纂朝鮮交涉資料』, 原書房,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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