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호군(大護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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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앙의 오위(五衛)에 소속된 종3품 서반직.

개설

고려의 중앙군 조직이던 2군(軍)·6위(衛)의 부지휘관인 대장군(大將軍)에서 유래하였다. 말기에 이르러 부호군으로 부르는 경우가 늘었다. 조선에 들어와 중앙의 10위에 종3품으로 대장군이 두어졌다. 태종 때 대호군(大護軍)으로 고치면서 이후 공식 명칭이 되었다. 군사를 직접 통솔하기보다는 궁궐에 입직하여 호위하는 일을 맡았다. 5위제로의 개편과 『경국대전』에서도 변화가 없었다. 양난 이후 5위제가 마비되면서 관명(官名)은 유지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기능하지 못했다.

담당 직무

고려시대 중앙군 조직의 중추였던 2군·6위의 부지휘관인 대장군에서 유래하였다. 점차로 말기에 이르면서 대호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조 성립 직후였던 1392년(태조 1) 7월에 문무 관제를 처음으로 정하면서 서반의 10위(衛)에 대장군 각 2명씩 종3품으로 설치했다. 그런데 1394년(태조 3)에 정도전이 군제 개편을 주도하면서 고려식 무관제를 철폐해야 한다며 대장군을 도위첨사(都尉僉事)로 고쳤다(『태조실록』 3년 2월 29일). 하지만 낯설었기 때문인지 사용되지 않았으며 계속 대장군으로 불리었는데 간혹 대호군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태종이 즉위하여 재차 군제를 바꾸면서 대호군이 공식 명칭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1402년(태종 2) 부활시킨 갑사(甲士)를 10위 대신 10사(司)에 분속시키면서 상호군(上護軍)과 함께 패두(牌頭)로 삼았던 조치였다(『태종실록』 2년 6월 11일). 하지만 군대를 직접 거느리는 자는 직위가 낮아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실질적인 통솔은 그 아래 호군(護軍)이 담당하였으며, 이는 그 이후에도 큰 변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궁궐에 숙위하며 호위하는 것이 주된 직무였다.

세조 때에 이르러 중앙군 조직이 5위제로 개편되었는데, 상·대호군은 수효가 적어서 행군(行軍)하기가 어려우니 출번(出番)한 부장(部將)으로써 대신하도록 했다(『세조실록』 3년 4월 1일). 그러므로 대호군이 실질적으로 군사에 관한 업무로 기능하기는 어려웠다.

변천

『경국대전』에서는 종3품, 정원 14명으로 규정되었으나 그 가운데 선전관(宣傳官)으로 1자리, 겸사복(兼司僕)에 2자리, 내금위(內禁衛)에 4자리, 공신적장(功臣嫡長)에 1자리가 배정되어 실제로 본래의 맡은 바 직무를 수행하는 인원은 4, 5명에 불과하였다.

계속해서 교대로 궁궐에 나와서 입직하여 임금을 호위해야 했다. 상호군·호군과 함께 5번으로 나누어 호군청(護軍廳)에 입직하였다. 한편 도성의 안팎을 출직 군사들을 거느리고 순찰해야 했는데, 이때 운령관(運領官)으로 임명되어 순찰 군사를 통솔하였다. 아울러 궁성(宮城)의 4문(門) 밖의 숙직 인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는데, 정병(正兵) 5명을 거느리고 나아갔다. 한편 대궐 안에서 갑작스런 비상사태로 큰 북[大鼓]을 거듭 치면[疊鼓] 각 문을 파수하는 당직자 이외의 입직하는 대호군 등은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의 동합문(東閤門) 밖의 정해진 위치에 집결하도록 했다.

양난 이후에 5위의 기능이 마비되면서 대호군도 관명은 유지한 채 다른 관직에 있다가 임기가 끝난 자에게 녹을 주기 위한 체아직(遞兒職)으로 활용되었다. 『속대전』에서는 정원이 2명 줄어 12명이 되었다. 즉 원록체아(原祿遞兒) 2명, 친공신(親功臣) 5명, 공신적장(功臣嫡長) 2명, 남우후(南虞候) 1명, 선전관 1명, 사자관(寫字官) 1명이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천관우, 『근세조선사연구』, 일조각, 1979.
  • 윤훈표, 「5위체제의 성립과 중앙군」, 『한국군사사 5 조선전기Ⅰ』, 육군본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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