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금위(內禁衛)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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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내금위 |
한글표제 | 내금위 |
한자표제 | 內禁衛 |
관련어 | 갑사(甲士), 겸사복(兼司僕), 궁궐(宮闕), 근시정병(近侍精兵), 금군(禁軍), 금여(禁旅), 금영(禁營), 내금위(內禁衛), 내금위 삼번(內禁衛三番), 내삼청(內三廳), 내상직(內上直), 내시위(內侍衛), 내취(內吹), 대호군(大護軍), 별시위(別侍衛), 별패(別牌), 상호군(上護軍), 생기(省記), 시위패(侍衛牌), 우림위(羽林衛), 예차내금위(預差內禁衛), 응양위(鷹揚衛), 행행(幸行)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왕무 |
폐지 시기 | 1884년(고종 21)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내금위(內禁衛)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7년 10월 21일, 『태종실록』 9년 6월 9일, 『태종실록』 15년 8월 5일, 『세종실록』 5년 10월 16일, 『세종실록』 6년 5월 6일, 『세종실록』 21년 1월 28일, 『세종실록』 21년 2월 13일, 『문종실록』 즉위년 8월 2일, 『고종실록』 21년 8월 27일, 『고종실록』 31년 11월 21일 |
국왕이 궁궐의 전각(殿閣)에 거처하거나 궁궐 외부에 행행(幸行)할 때 지근거리에서 경호하던 정예 군사인 근시정병(近侍精兵).
개설
내금위는 조선전기부터 국왕의 호위를 전담하던 경호부대로서 국왕이 거처하는 곳에서부터 행차하는 지역에 이르기까지 늘 함께 움직이던 금군(禁軍)이었다. 태조와 정종을 거쳐 태종 초기까지는 한양보다 개성에 거처하는 경우가 많았듯이 국왕의 호위에 관한 군대나 제도도 미비한 시기였다. 그러나 태종이 집권하면서 고려와 다른 제도를 정착시키기 시작했으며, 그중 하나가 내금위의 설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내금위는 1407년(태종 7년) 기존의 호위병인 내상직(內上直)을 고쳐서 설치하였다(『태종실록』 7년 10월 21일). 내금위가 설치되었다고 즉시 국왕의 호위체제가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내금위가 설치된 지 2년 후인 1409년에도 호종하는 법이 산만하여 호위군이 배치될 자리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이에 내금위를 비롯하여 내시위(內侍衛)와 별시위(別侍衛)에서 입직(入直)하는 자들을 대가(大駕) 앞에 세우고, 출직(出直)한 자는 대가 뒤에 있게 하는 규정을 마련하였다(『태종실록』 9년 6월 9일).
그리고 갑자기 국왕의 호위를 알려서 내금위 등의 병력을 집결시킬 때는 취각법(吹角法)을 이용하였다. 취각법은 병조에서 만들었는데, 앞서 의흥부에서 제정한 취각령과 차이가 있어 다시 상정한 것이었다. 만약 국왕이 용병(用兵)의 명령을 내리면 병조의 입직 당상관(堂上官)이 친히 품명(稟命)하여 선자기(宣字旗)를 받아서 여러 궐문(闕門) 밖에 세우고 취각(吹角)을 하였다. 이때 입직하고 있는 내금위는 모두 갑옷을 입고 병기를 지닌 채 궁궐 문을 수비하였다. 또한 출번(出番)한 내금위는 취각의 소리를 듣고 즉시 궁궐에 나아가 궐문 밖에서 주둔하고 명령을 기다렸다[『『태종실록』 13년 8월 21일 1번째기사]. 취각은 내취각인(內吹角人)과 외취각인(外吹角人)이 담당했다. 국왕이 명령을 내리면, 내취각인이 각(角)을 1통(通) 불었으며, 외취각인은 곧 문루(門樓)에 올라가 각(角)으로써 응하고, 또 사방 높은 곳에 나누어 올라가 군마(軍馬)가 다 모일 때까지 각을 불었다(『태종실록』 15년 8월 5일).
조직 및 담당 직무
국왕의 최측근 호위 병력인 내금위는 직임이 근시(近侍)에 속하므로, 선발하는 방법도 신중하게 정해졌다. 시재(試才)함에 있어서, 보사(步射)는 200보(步) 거리에 3시(矢) 이상 과녁을 관통해야 했으며, 기사(騎射)는 3발(發)에 2중(中) 이상으로서 말 타는 수법이 민첩한 자를 취하였다. 실력 외에 신분도 중요했다.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그 거주지에서 가문의 실태를 조사한 뒤에 서용하였다(『세종실록』 5년 10월 16일). 이후 조선후기에는 조총과 같은 화기를 다루는 기예가 추가되었다.
내금위의 근무는 3번(番)으로 나누어 이루어졌는데, 1번(番)의 위군(衛軍)이 30명이고, 절제사가 2명이었다(『세종실록』 6년 5월 6일). 1439년(세종 21) 내금위의 인원은 200여 명이었다. 그런데 200여 명 중에는 호위에 적합하지 않은 자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중에서 무재(武才)가 특이하고 지략이 있는 자 60명만을 선발하여 3번으로 나누고 윤번으로 입직(入直)하되 봉급을 주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1년 1월 28일). 내금위가 상시시위(常時侍衛)를 할 때는 갑옷을 입지 않았으며, 단지 환도(環刀)만 휴대하였다. 근정전에서 진행된 조회에서는 모두 백철갑(白鐵甲)을 입고, 전내에 10인씩 좌우로 분립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월대(月臺)의 동서로 나누어 호위하였다(『세종실록』 21년 2월 13일). 내금위가 궁전(弓箭)을 패용(佩用)하게 되는 것은 문종대이며 수은갑(水銀甲)을 착용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8월 2일).
변천
조선후기에도 국왕 호위군사로서 내금위의 중요성은 변함이 없었으나, 제도의 변화가 있었다. 겸사복·우림위와 함께 금군청에 속하였다가 1775년(영조 51)에 용호영에 속하였다. 정조대는 훈련도감의 마병(馬兵)과 금위영(禁衛營)의 기사(騎士)만도 못한 실력을 보였다. 내금위에 선발된 사람들이 가난하고 급료를 받기 위해 투탁(投托)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그 대책으로 내금위의 1번(番)을 선천(宣薦)의 과(窠)로 정해 놓고, 이를 무변(武弁)의 초사(初仕)하는 품계로 하여 기량이 뛰어난 자들을 선발할 수 있게 하였다. 이에 병조에서는 선천내금위사목(宣薦內禁衛事目)을 만들었다. 선천 내금위는 무예는 물론 병서에도 능통해야 했으며, 선전관 등을 거쳐 고위 무관으로 진급할 때 반드시 선천 내금위를 거치게 했다[정조실록』 1년 7월 25일 3번째기사].
1884년에 군제가 개혁될 때 내금위는 병조 판서가 관할하다가(『고종실록』 21년 8월 27일) 1894년에 이르러 군무아문(軍務衙門)의 편제에 따라 재편되면서 사라지게 된다(『고종실록』 31년 11월 21일).
의의
내금위는 조선시대 국왕의 경호를 전담하던 병력으로 국왕이 참석하는 왕실의 잔치에서 국가 의례 행사가 벌어지는 장소 지근에서 호위하였다. 이들은 당대 정예병이었음은 물론 군관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내금위 병력의 선발과 구성을 통해 조선시대 무관 세력의 형성과 분포를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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