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무아문(軍務衙門)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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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군무아문 |
한글표제 | 군무아문 |
한자표제 | 軍務衙門 |
하위어 | 총무국(總務局), 친위국(親衛局), 진방국(鎭防局), 해군국(海軍局), 의무국(醫務局), 군수국(軍需局), 회계국(會計局) |
관련어 | 군부(軍部), 병조(兵曹), 선무조례(選武條例), 외국인(外國人) 고문관(顧問官), 순무영(巡撫營), 군부(軍部), 군무아문관제(軍務衙門官制), 갑오개혁(甲午改革), 순무영(巡撫營), 친위영(親衛營), 갑오개혁(甲午改革) 팔아문(八衙門), 총어영(摠禦營), 통위영(統衛營), 장위영(壯衛營), 경리청(經理廳), 기기국(機器局), 연무공원(鍊武公院)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고종 |
집필자 | 왕현종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군무아문(軍務衙門) |
1894년 갑오개혁 때 설치되어 전국 육·해군의 군정(軍政)을 통괄했던 중앙 행정 아문.
개설
군무아문은 1894년 6월 갑오개혁 초기 의정부와 8아문을 개편할 때 만들어졌다. 전국 육군과 해군의 군정을 통괄하고 군인과 군속을 감독하는 등 군무에 관한 모든 행정 사무를 담당하였다. 관원으로는 대신과 협판, 참의, 주사 등이 있었으며, 관서로 총무국, 친위국(親衛局), 진방국(鎭防局), 해군국(海軍局), 의무국(醫務局), 군수국(軍需局), 회계국이 있었다. 군무아문은 새로 군인을 뽑기 위해 선무조례(選武條例)를 제정하고 각 군영을 통합하여 지휘 체계를 단일화하려고 하였다.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외국인 고문관과 일본인 교관을 파견하여 군 통제와 군인 양성에 간섭하려고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94년 6월 개혁 사업을 주도한 군국기무처는 조선 왕조 국가의 권력 구조를 변경하여 의정부와 궁내부를 분리하였다. 또한 내무부와 육조(六曹), 기타 지나치게 많은 기구들을 통폐합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이전의 육조 이하 군무 관련 관서인 총어영(摠禦營), 통위영(統衛營), 장위영(壯衛營), 경리청(經理廳) 등을 비롯하여 1885년 이후 근대화 추진 기구인 내무부에 소속되었던 기기국(機器局), 연무공원 등 군무와 관련된 기관도 함께 통폐합하여 재배치하였다.
1894년 6월 28일 군무아문은 의정부를 중심으로 중앙 행정 기구의 하나로 개편되었다. 군무아문은 전국 육·해군의 군정을 통괄하고 군인과 군속을 감독하며 관내 모든 부서를 통솔하는 기관이었다. 관원은 대신 1명, 협판 1명, 참의 8명, 주사 36명 등 46명으로 구성되었다.
조직 및 역할
군무아문의 관서로는 총무국, 친위국, 진방국, 해군국, 의무국, 군수국, 회계국이 편성되었다. 총무국은 설치된 각 국의 사무를 관장하며, 대궐 내 예속된 군대를 장악하여 모든 징병, 편제된 군대 사무를 총감독하였다. 진방국은 서울과 외방의 진방과 제영의 사무를 관장하였다. 해군국은 전국 해군을 총감독하고 군인과 군속, 관내의 여러 부를 통솔하였다. 의무국은 육·해군 내의 군 무기를 사들이는 사무를 관장하였다. 군수국은 전국 육·해군의 군량·복장 등의 사무를 관장하였고 회계국은 군무아문에서 출납하는 재무 장부와 여러 영진의 회계 사무를 관장하였다.
군무아문은 이전의 병조 건물을 사용하였다. 1894년 7월 18일 군무아문은 1880년대 이래 군무에 관련된 부서를 통폐합시켜 휘하로 재편성하였다. 1894년 11월 21일에는 호위부장(扈衛副將)·통어사(統禦使)·장어사(壯禦使)·총어사(摠禦使)·경리사(經理使)를 모두 폐지하였으며, 그 이하 장수와 군사·이예(吏隸) 등을 재편제하였다.
군무아문은 1894년 8월 16일 새로 군인들을 뽑기 위해 선무조례를 제정하였으며, 국문으로 군졸 교과서를 편찬하여 군졸을 교육시키기도 하였다. 8월 24일 따로 설치한 친군영을 제외하고 각 군영을 통합하여 대장 1명을 두어 지휘 체계를 단일화하였다. 당시 동학농민군의 봉기에 대비하여 각 도의 진보(鎭堡)와 산성을 순시하고 군대를 재정비하기도 하였다. 1894년 9월에는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삼례에서 집결하여 재봉기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순무영을 설치하고 주요 요충지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하도록 하였다.
변천
일본은 조선 정부의 독자적인 군대 설치에 반대하여 군무아문의 위상과 역할을 가급적으로 제한하려고 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시작하면서 조선의 갑오개혁 정권을 전쟁 수행의 협조 기관으로 만들기 위해 1894년 8월 군무아문에도 외국인 고문관을 초빙할 것을 결정하였다. 장차 친위영(親衛營)의 신식 근위대를 발족시키되 이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고자 하였다. 1895년 3월 26일 칙령 55호 군부 관제가 공포되어 군무아문의 명칭을 군부로 고치고 관제를 전면 변경하면서 군무아문은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의안(議案)』
- 『관보(官報)』
- 국사편찬위원회,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1~40, 국사편찬위원회, 1986~1994.
- 송병기·박용옥·박한설 편저, 『한말근대법령자료집』1~4, 국회도서관, 1970~197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