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기국(機器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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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근대적 병기 제조를 위해 설치한 독립 관영 기구.

개설

기기국은 1883년 5월에 근대 병기의 제조를 담당할 기구로 설치되었고, 1884년 8월에 조선 개국 이래로 군기의 제작을 관장해 오던 군기시(軍器寺)를 흡수 통합하여 병기를 제조하는 대표 기구가 되었다. 이 기구는 정부의 어느 기관에도 예속되지 않은 독립 기관으로 운영되었고, 친군(親軍) 각 영의 영장(營將)이 기기국 총판을 겸임하였다. 기기국의 운영 자금은 정부 재정 수입원인 공조(貢條)에서 책정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기기국 설치 이전에는 1881년 1월 신설된 통리기무아문에 군물사(軍物司), 기계국(機械司) 등을 설치한 바 있다. 또한 1881년 9월에는 군사 유학생인 영선사(領選使)를 청나라에 파견하였는데, 영선사 대표 김윤식(金允植)은 청나라 도착 즉시 천진기기국(天津機器局)을 시찰하였다. 또한 1882년 2월에는 천진기기국 동국총판(東局總辦)반준덕(潘駿德)의 권유로 유학생들에게 화약 탄환 제조법, 전기·화학·제도·제련·기초 기계학과 외국어를 가르쳤다. 김윤식은 청나라 유학생의 귀국과 함께 청나라의 병기 기술자도 고빙하여 우리나라에 청나라의 제도를 본뜬 병기 공장 설립을 기도하였다.

한편 김홍집은 1882년 5월 청나라의 대조선 외교 정책 담당자 마건충(馬建忠)에게 50만 냥의 차관 제공과 기기국 설립을 위한 기계 구입의 조건을 타진하였다. 그리고 그 담보로는 책문(柵門)을 통해 밀무역되는 홍삼에 부과하던 세금인 포삼세(包蔘稅)를 제시하였다. 그 결과 6월 10일 기기 구입을 요청하는 조선 정부의 공식 문서가 천진기기국동국(天津機器局東局), 남국(南局)과 천진해관도해군군계소(天津海關道)海軍軍械所) 등에 접수되었다. 그러나 임오군란으로 계획은 당분간 유보되었다.

이후 조선 정부는 그해 10월 27일 인천으로 향하는 상해초상국(上海招商局) 윤선(輪船)·흥감선(興感船)을 통해 근대 기계 공장 설치에 필요한 동모(銅冒)와 강수제조기(䃨水製造器) 등 62종의 근대적 과학 기계와 53종의 근대 과학 기술 서적을 들여왔다. 이때 중국인 광무국(鑛務局) 총판탕징싱[唐景星], 상무관천수탕[陳樹棠]과 독일인 묄렌도르프([穆麟德], Möllendorff, Paul George von) 등이 같이 초빙되었다.

조직 및 역할

이를 바탕으로 하여 1883년 4월 11일 고종은 군국아문에 기기설창(機器設廠)의 제조절목(製造節目)을 마련하여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고, 이튿날 다시 양향청(糧餉廳)에 기기창(機器廠)을 건설하도록 분부하였다. 이에 따라 삼청동 옛 북창(北倉) 지역에 건립 장소가 마련되었고 5월 23일 기기창절목(機器廠節目)이 완성·보고되었다. 이 절목에 따라 조선 정부는 기기국을 운영할 인사로 김윤식(金允植), 이조연(李祖淵), 윤태준(尹泰駿) 등 대표적인 친청(親淸) 거물들을 임명하고 당일 기기국을 창설하였다(『고종실록』 20년 5월 23일). 그리고 6월 2일 삼청동 북창 구지에서 업무를 개시하였다.

기기국은 1885년 11월에 낙성된 전환국 건물과 함께 기계 생산의 구조를 갖추었다. 기기국 창설과 함께 기기국의 통제와 감독을 받는 병기 공장 즉, 기기창은 1883년 8월 22일 착공하여 4년 2개월 만인 1887년 10월 29일 준공되었다(『고종실록』 24년 10월 29일). 준공 당시 기기창에서는 증기 기관에 의한 동모(銅帽) 생산과 소총 제작이 비로소 이루어졌고, 1889년에는 12마력의 증기 기관에 의한 소총 제조가, 1891년에는 화약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변천

기기국은 청일전쟁 과정에서 1895년 포공국(砲工局)으로 개칭되었고, 러일전쟁 이후인 1905년에 다시 군기창(軍器廠)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운영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한성순보(漢城旬報)』
  • 권석봉, 「영선사행(領選使行)에 대한 일고찰:군계학조사(軍械學造事)를 중심으로」, 『역사학보』17·18, 1962.
  • 김정기, 「1880년대 기기국·기기창의 설치」, 『한국학보』4권 1호,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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