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문(柵門)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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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책문 |
한글표제 | 책문 |
한자표제 | 柵門 |
동의어 | 고려문(高麗門), 변문(邊門) |
관련어 | 변책(邊柵), 봉금(封禁), 봉황성(鳳凰城), 봉황성장(鳳凰城長), , 유조변(柳條邊), 책문개시(柵門開市), 책문후시(柵門後市) |
분야 | 정치/외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이철성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책문(柵門)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15년 8월 8일 |
청의 봉황성장(鳳凰城長)이 관리한 조선과 청의 국경 관문.
개설
책문은 조선연행사와 청나라의 칙사가 오갈 때 통과하는 국경 관문으로 출입국 절차와 세관 통관 절차가 이루어지던 곳이다.
내용 및 특징
책문은 청조(淸朝)에서 변문(邊門)을 두루 일컫는 의미로도 쓰였다. 이때의 변문은 청의 봉금정책에 따라 설치된 버드나무로 만든 울타리, 즉 유조변(柳條邊)의 출입문을 의미하였다. 유조변은 청의 중국 동북 지방 지배 정책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청조의 발상지인 용흥지지(龍興之地)를 보호하는 한편, 흑룡강 유역으로 남하하는 러시아에 대비하는 목적에서 만들었다. 유조변은 버드나무를 꽂아 담장을 만든 형태로 높은 것은 3~4자(약 0.9~1.2m)이고 낮은 것은 1~2자(약 0.3~0.6m)였다고 한다. 또 변문은 중국 대나무 울타리와 비슷한데, 조선후기 관방지도인 「조선여진분계도(朝鮮女眞分界圖)」에는 봉황성에서 개원의 위원보까지 6개의 변문이 나타나 있다.
『조선왕조실록』등의 문헌에 나타나는 책문은 이러한 여러 개의 변문 중 고려문(高麗門)으로도 불리었다. 안동대동구(安東大東溝)의 서쪽인 요동 반도 앞바다로부터 안동(安東, [단둥])과 봉황성 사이를 가로지는 유조변의 첫 관문이었다. 옛 모습을 지금 현장에서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록을 통하여 대략적인 위치와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청대 책문은 압록강에서 서북쪽으로 120리(약 47㎞) 위치에 있었으며, 봉황산의 남쪽 기슭에 있었다고 한다. 청대의 책문은 명말청초에 비하여 10리(약 4㎞)쯤 압록강 쪽으로 더 나온 것이었다. 『연원직지』에는 책문이 “옛날에는 봉황성 동쪽 5리(약 2㎞)에 있어서 압록강과의 거리가 130여 리(약 51㎞)였다. 그 땅을 비워 사람이 살지 않는 것이 옛날의 완충지대와 같아서, 이쪽이나 저쪽이 침범하는 것을 방지하였다. 그런데 강희제 때에 봉황성에 인구가 많아지자 그 농토와 목축할 땅을 넓히려고 여기에 옮겨 설치하였다.” 하였다. 따라서 청초에 설치된 문을 구책문(舊柵門), 그 후에 설치된 것을 책문이라고 인식하였다(『숙종실록』 15년 8월 8일).
책문의 형태는 “판자로 문을 하고 풀로 덮개를 하였다.”거나 “한 길 되는 나무막대기를 벌여 세운 것인데 버드나무를 꺾어 포전(圃田) 울타리를 한 것에 불과하다. 문 1칸이 우뚝 솟아 있는데 띠로 덮었다.” “1칸쯤 되는 초옥인데 두 짝으로 만든 판자문의 높이는 겨우 한 길 남짓 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책문은 초가집 형태의 문 1칸 정도로 생각된다. 주변의 목책도 “우리나라 목장의 마구간 같다.”거나 “목책 사이로 말을 달리고 수레를 몰더라도 제지할 수 없을 것 같다.”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책문 주변의 유조변 역시 매우 허술한 형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책문의 출입 책임은 이곳에서 약 10리 정도 떨어진 봉황성의 성장이 맡았다. 조선의 사행 일행이 책문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루 전에 역관에게 사행 목적과 사행 일행의 명단과 인원수 및 말의 수효를 기록한 입책보단(入柵報單)을 책문의 수문장에게 주어 봉황성장(鳳凰城長)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면 다음 날 봉황성장이 책문 밖으로 나와 영접하고 입책보단에 실린 사람과 말의 수를 점검한 뒤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 과정에서 심양의 낭중(郎中) 1명이 물품세를 주관하였고, 문대사(門大使) 1명은 사찰(査察)과 수색(搜索)을 주관하였다. 세금은 나귀나 노새에 한하여 부과하였고 나머지 물품은 불문에 붙였다.
책문으로 들어간 사행 일행은 봉황성장을 비롯한 청측 관원들과 책문을 통과하는 데 따른 의식을 치루고 인정예단(人情禮單)을 관원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조선에 책문 안에 무사하게 들어왔다는 보고인 입책장계(入柵狀啓)를 띄웠다. 이와 같은 과정은 청에서 돌아오는 출책(出柵) 과정에서도 거의 동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책문은 조선과 청국의 출입국 절차와 물품 통관 및 관세를 부과하던 장소였다. 명·청 교체기에는 양국 간 정치 현안을 풀기 위한 만남의 장소였으며, 조선과 중국의 정보가 상호 교류되던 곳이었다. 천주교 서적의 밀반입과 주문모 신부의 밀입국 그리고 조선과 청의 물적 인적 교류가 일어나던 장소였다. 하지만 책문이 주목을 받은 가장 큰 원인은 조선 사행이 오고 가는 기간에 맞추어 책문 안 첫 마을인 책문촌에서 대규모의 무역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책문 개시와 후시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열하일기(熱河日記)』
- 『중경지(中京誌)』
- 『부연일기(赴燕日記)』
- 『연원직지(燕轅直指)』
- 『연행일기(燕行日記)』
-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 이철성, 『조선후기 대청무역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0.
- 유승주·이철성, 『조선후기 중국과의 무역사』, 경인문화사, 2002.
- 이철성, 「조선후기 압록강과 책문 사이 봉금지대에 대한 역사·지리적 인식」, 『동북아역사논총』 23,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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