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장(營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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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조대에 각 도에 있는 지방 군대를 관할하기 위하여 둔 진영(鎭營)의 장관(將官).

개설

영장은 진영장(鎭營將) 또는 진장(鎭將)이라고도 한다. 선조대에 두어 1894년(고종 31)까지 존속하였다. 정3품 관직으로 중앙의 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진무영(鎭撫營) 등과 각 도의 감영(監營)·병영(兵營)에 속한 지방군을 통솔하였다. 모두 겸직으로 중앙 소속의 진영장은 판관(判官)·중군(中軍) 및 경기 일원의 부사(府使)·목사(牧使)가 겸하였고, 각 도는 도내 각 주·군을 적당히 나누어 진영을 설치하고 그 지방 수령이 겸임하였다. 각 도의 진영은 전·후·좌·우·중의 5영으로 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별영(別營)을 더 두었다. 철폐될 당시에는 팔도에 46인, 강화부(江華府)의 진무영(鎭撫營)에 5인이 있었다.

담당 직무

영장은 정3품 당상관(堂上官: 한자 추가)직으로, 팔도에 46인, 즉 경기 6인, 충청 5인, 경상 6인, 전라 5인, 황해 6인, 강원 3인, 함경 6인, 평안 9인과 강화부의 진무영에 5인이 있었다. 이들은 중앙의 총융청·수어청·진무영 등과 각 도의 감영·병영에 소속되어 지방 군대를 통솔하였다. 다만 초기 영장의 품계는 일정하지 않았는데, 전쟁 중이라 영장을 감당할 만한 적임자를 확보하기 어려워 품계에 관계없이 영장에 임명한 때문인 듯하다. 또한 영장은 속오군의 훈련과 지휘를 담당하는 존재이므로 그 설치는 수령의 치민(治民)과 대비되는 관병(管兵)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런 제도가 없으니 진관수령(鎭管守令)을 잘 택해서 소속된 고을을 검거케 하자는 이상의(李尙毅)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대부분의 지역에서 영장이 별도로 임명되지 않고, 겸영장제(兼營將制)가 실시되었다.

따라서 영장은 중앙의 경우 판관이나 중군 및 경기 일원의 부사·목사가 겸임하였다. 지방의 경우에는 수령이 겸하였다. 각 도의 진영에는 전·후·좌·우·중의 5영장이 있었으며, 필요에 따라서 별영을 설치하고 별영장(別營將)을 두었다. 현종대부터는 수령이 겸하던 토포사(討捕使)의 직임을 영장이 겸임하도록 해서 증가하던 도둑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1627년(인조 5)에 이정구(李廷龜)가 작성한『영장절목(營將節目)』에 따르면 영장은 반드시 당상관 이상에서 차출하되, 문관(文官)이나 음관(蔭官)이 선발되는 경우에는 군병 통솔의 원활함을 위해 엄격하게 선발하도록 하였다(『인조실록』 5년 4월 20일). 특히 양서(兩西) 지방은 수령이 모두 무신이었으므로, 경관(京官)을 뽑아서 보내지 않았다. 다만 관찰사가 수령 중에서 재국(才局)이 있는 자를 선발하였다. 그래서 당하관이 영장을 겸하는 경우도 있었다. 영장은 임기 만료 이전에는 함부로 이직할 수 없었다. 만약 임기 만료 전에 이직하면 이력을 보장받지 못하였다. 새롭게 영장에 제수된 자는 15삭(朔) 이전에 천전(遷轉)할 수 없었다. 근무 일자는 제수된 날로 계산했으며, 구임으로 승급된 자는 10삭 전에 천전할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혹 승급하여 영장이 된 자가 임기를 채우기 전에 체직(遞職)하거나 파직(罷職)되면 삭수의 다소에 구애받지 않고 그 자급(資給)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들은 직무 교대 시에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사무를 인수인계하였다. 다만 파직 또는 나문(拿問)을 당한 경우는 본직과 겸직의 인부(印符)를 그대로 주어 겸관(兼官)을 차출하지 않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평시에는 소초군병(所哨軍兵)을 조련하고 유사시에는 출전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다. 매년 10월 15일에서 다음 해 2월 15일까지는 매 삭마다 세 차례씩 습진(習陣)을 반복하였다. 이를 매년 말에 감사·병사가 5영을 회동시켜 한 차례 시험을 치른 뒤 그 고과를 평가하였다.

이와 함께 영장이 임기를 채우면 수령 또는 곤수(閫帥)로 나아갈 수 있었는데, 임기 동안은 군병교련 및 군비 확충에 충실하여야 하였다. 대체로 각 도의 감사·병사가 병정(兵政)을 전담한 데 비하여 영장은 조련(操鍊)·군기(軍器)·습진 등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그 밖에 각 진(鎭)에 산재되어 있는 사복시(司僕寺) 관할의 목장에 대한 감목(監牧)을 겸하기도 하였다.

변천

속오군의 조련과 지휘를 총괄하는 영장의 설치는 속오군의 창설과 때를 같이한다. 조선후기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속오법에 따라 편성된 속오군의 편제는 영(營)-사(司)-초(哨)-기(旗)-대(隊)로 되어 있다. 따라서 속오군이 존재하는 한 속오군의 최상부 단위인 영의 책임자인 영장이 있었다. 이는 1627년(인조 5)에 이정구의 『영장절목』에 잘 나타나 있는데, 각 도에 속오군을 창설할 때 영장 이하 장관을 두었다.

영장이 설치된 기록으로는 1598년(선조 31) 평안도 일부 지역과 수원의 독성산성 및 용인 석성산성(石城山城) 등에 영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울러 『진관관병편오책잔권(鎭管官兵編伍冊殘卷)』에 의하면 평안도의 진관이나 경기도의 5영은 『경국대전』의 거진(巨鎭)과 일치되는 곳도 있지만 대체로 새롭게 편성되었으며, 군사지휘권을 담당한 것은 거진 수령이 아니라 영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종래 수령의 권한에 속한 군사권이 영장에게 위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영장을 감당할 적임자가 없는 등의 이유로 속오군이 창설되었을 때 영장을 별도로 설치하지 않고 수령이 겸한 곳도 있었다. 결국 속오군의 창설과 함께 영장제(營將制)가 성립했지만 지역에 따라 영장을 별도로 둔 곳도 있고, 수령이 겸한 경우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전란이 끝난 1601년(선조 34) 6월에 대부분의 지역에서 영장이 별도로 임명되지 않고, 겸영장제가 실시되었다. 또한 겸영장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중군제도(中軍制度)가 활용되었는데, 그러한 사실은 사간원이 1611년(광해군 3)에 “속오군의 훈련을 담당한 중군 이하 제 장관이 훈련에는 뜻이 없고, 오로지 침학만 일삼는다”며 처벌을 건의한 데서 잘 알 수 있다(『광해군일기』 3년 3월 21일).

그러나 정묘호란 당시 문·음관수령(文·蔭官守令)으로 영장이 된 자가 병법을 몰라 군사를 이끌고 적과 싸울 수 없어, 갑작스럽게 장수를 선발해야 하는 폐단이 노출되었다. 이에 정부는 정묘호란이 끝난 1627년(인조 5) 이정구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사적 식견이 있는 당상관 이상을 영장으로 파견하여 겸영장제의 약점을 시정하려 했다. 병법이 뛰어난 자를 영장으로 파견하여 거진의 수령이 행사했던 군사지휘권을 이양받아, 속오군 등의 훈련을 강화하면서 청과의 전쟁에 대비하자는 것이다. 인조대의 서인정권은 중앙에 총융청·수어청·어영청 등을 창설하여 중앙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영장을 전국적으로 파견하여 속오군 등 지방내륙군의 훈련과 지휘를 효과적으로 시행함으로써 후금과의 전쟁에 대비하려 하였다.

하지만 병자호란에서 조선은 후금에 참패하였다. 조선의 중앙군과 지방의 영장제가 후금의 군대를 격파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이 입증된 것이다. 그렇다고 병자호란에서 영장의 활약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강원도의 원주영장권정길(權井吉)은 갑자기 청군이 뒤를 엄습하는 바람에 패하기는 했지만, 근왕병을 이끌고 여러 차례 적을 격파하면서 검단산에 이르러 봉화를 올려 남한산성의 사람들에게 원병이 있음을 알려 사기를 진작시킨 바 있다. 또 상주영장윤여임(尹汝任), 안동영장선세강(宣世綱) 등도 청군에 맞서 활약하였다.

하지만 새로이 큰 난리를 겪은 후 각 관의 물력이 탕진된 데다 급히 조련할 일도 없으므로 영장에 대한 공궤(供饋)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1637년(인조 15) 영장을 혁파하였고, 복설하자는 논의가 있었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병자호란 이후 수령이 영장의 임무를 겸하는 겸영장제가 1654년(효종 5)까지 시행되게 된다.

한편 겸영장제의 실시와 함께 광해군대와 마찬가지로 중군제도를 활용하려는 방안이 1639년(인조 17)에 제기되었다. 즉 종전처럼 각 영의 중군을 구차하게 본읍인으로 차정함으로써 속읍을 검칙하는 데 위엄이나 힘이 없게 하지 말고 경외나 관직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오직 재주에 따라 중군을 임명하고, 문·음관 수령이 영장을 겸하는 경우에는 각 영의 중군이 대신 전쟁에 나가게 하였다. 아울러 무관수령이 영장을 겸하는 경우에는 영장이 참전하면 중군이 본읍에 남아 방어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근태를 기준으로 중군의 근무실적을 평가하면서 특별한 성적이 있으면 별도로 발탁함으로써, 중군제도의 효용성을 증대하려 하였다. 또 중군이나 영장을 서로의 수령으로 임명함으로써 국방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안도 추진된 바 있다.

호란을 겪은 후 즉위한 효종은 북벌론을 내세워 민심을 수습하는 가운데 양전·농서 편찬·대동법·노비추쇄정책 등을 추진하여 국가를 재건하려 하였다. 특히 효종은 북벌을 위해 군비를 확충하고 있었는데, 지방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영장을 별도로 파견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게 된다. 즉 1652년(효종 3) 박서(朴遾)는 평안도와 황해도는 청의 감시 때문에 군사훈련을 전혀 할 수 없고, 다만 삼남만 연습을 시키고 있는데 수령이 영장을 겸한 이후 연습이 착실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며 영장을 파견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호서방백을 역임한 형조 참판김여옥(金汝鈺)도 수령이 영장을 겸임하면서 군정을 수행하는 것이 영장을 별도로 설치한 것보다 못하고, 군액도 감축되었다고 지적하였다(『효종실록』 3년 2월 3일). 이후 영장 파견에 대해 논의가 진행되다가 1654년(효종 5) 특진관 원두표(元斗杓)가 우선 삼남에 영장을 파견하여 군무를 전적으로 담당케 하는 것은 물론, 전쟁에 임해 병법을 모르는 수령을 새로운 장수로 교체하는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효종실록』 5년 2월 11일).

이렇게 효종대부터 삼남에는 영장을 파견하고, 다른 지역은 수령이 영장을 겸하는 겸영장제가 시행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영장제의 운영 형태는 대체로 후대에도 계속 지켜짐으로써, 영장제의 운영 형태는 효종대에 굳어진다. 물론 경상도의 김해·여산 등은 효종대와는 달리 수령이 영장을 겸하고 있고, 삼척에는 별도의 영장이 파견되었으며, 육진의 경우 강을 따라 바둑알처럼 펼쳐진 성을 방어하기 위해 1년 전에 설치한 영장을 혁파하기도 하였다. 또 경기도의 영장은 숙종대에 중앙의 군영인 총융청과 수어청에 속하게 되었으며, 관동의 영장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병사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또 설치 지역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는 등 영장제는 다양한 변천을 거듭했다. 하지만 영장의 파견 및 겸영장제의 형태는 후대에도 대체로 효종대의 틀을 지키다가, 영장제는 1895년(고종 32)에 폐지된다.

의의

영장은 임진왜란의 경험을 토대로 속오군 각 진영의 최고 책임자로서 거진 수령을 대신하여 속오군을 훈련하고 지휘함으로써 지방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영장제가 처음 도입된 선조대에는 영장의 품계가 일정하지 않았으며, 전국에 영장을 설치하지 않았고, 진관체제하의 거진 수령이 영장을 겸하는 겸영장제가 시행되고, 겸영장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군제도도 활용되었다. 이후 인조대에는 전국적으로 영장이 파견되었으나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이 패하게 되자,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영장의 파견은 정지되고 겸영장제로 환원된다. 이후 효종에 의해 북벌론을 위한 국가재건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지방군을 강화하기 위해 삼남을 중심으로 영장을 파견하였다. 특히 효종대의 영장은 지방군의 훈련을 강화함은 물론이고, 토호가 은닉한 한정(閑丁)을 철저히 수괄하여 군역에 충정시켜 건장한 군역자원을 확보하려 하였다. 이후 영장제는 대체로 삼남은 영장을 파견하고, 삼남 이외의 지역은 수령이 영장을 겸하는 겸영제로 운영된다.

따라서 영장은 임진왜란 이후 약화된 지방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운영된 직책으로 이완된 속오군의 훈련을 통해 지방군을 강화하기 위해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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