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영(鎭撫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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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한성과 서해의 수로 등을 방위하기 위해 강화도에 설치하였던 군영.

개설

강화도의 수비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1678년(숙종 4) 강화유수(江華留守)로 하여금 진무사(鎭撫使)를 겸하게 하면서 진무영 설립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진무영이 독립된 지휘체계를 갖춘 독자적 방어 단위로 자리 잡게 되기까지는 10여 년간에 걸쳐 각 영의 편제, 속읍의 정비, 군비의 확보 등의 꾸준한 후속 조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700년(숙종 26) 강화부(江華府)에 그 본영을 설치하였다.

정조 때 지나치게 비대하여 국가 재정에 많은 부담을 주고 있으며 쓸데없이 늘어난 병력을 줄여야 한다는 명목으로 군영의 감축을 추진했는데 그 일환으로 1779년(정조 3)통어영(統禦營)을 병합하였다. 그러나 문제가 많다는 지적에 따라 1789년(정조 13)에 다시 분리하였다.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 한강 하구에 대한 방어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본격적인 강화 작업에 나섰다. 군영의 책임자인 진무사는 경기도 연안 일대의 육군과 수군을 통제, 지휘하여 유사시에 전권을 행사하게 하는 등 수도 방어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친정한 뒤에는 수도 외곽에 대한 방비보다 궁궐 수비를 강화함으로써 경기 해안 일대를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진무영의 위상이 약화되고 진무사의 지위도 격하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병자호란의 경험으로 남한산성의 군사적 효용에 대한 심각한 회의가 제기되는 상황에서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더욱 부각되었다. 이에 따라 유수영과 총융청(摠戎廳)이 혼재되어 작전상의 혼란을 야기하는 것보다 강화도 자체를 하나의 독립된 방어 단위로 구축하려는 시도가 진무영의 설립으로 실현되었다. 우선 1678년 강화유수로 하여금 진무사를 겸하게 하면서 진무영 설립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 뒤 10여 년간에 걸쳐 각 영의 편제, 속읍의 정비, 군비의 확보 등의 꾸준한 후속 조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1700년(숙종 26)에 강화부에 본영이 설치되었다.

그 당시 관원으로는 종2품 사(使) 1명으로 강화유수가 겸했다. 정3품 중군(中軍) 1명이었으며 정3품 진영장(鎭營將) 5명으로 전영(前營)은 부평부사(富平府使)가, 좌영(左營)은 통진부사(通津府使)가, 중영(中營)은 본부 중군(中軍)이, 우영(右營)은 풍덕부사(豊德府使)가, 후영(後營)은 연안부사(延安府使)가 겸했다. 여기에 충청도 12개읍이 소속된 해미(海美)의 별중영(別中營)으로 이루어졌다. 강화를 중심으로 하여 경기와 황해의 연해읍이 진무영의 지휘체계에 포함되어 하나의 방어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정조 때 지나치게 비대하여 국가 재정에 많은 부담을 주고 있으며 쓸데없이 늘어난 병력을 줄여야 한다는 명목으로 군영의 감축을 추진했는데 그 일환으로 1779년 통어영을 병합하였다. 그러나 문제가 많다는 지적에 따라 1789년에 다시 분리하였다. 최고 책임자인 강화유수가 겸임하는 진무사와 실무책임자 격인 중군은 각 1명씩 그대로 두었고 다만 수성장(守城將)을 겸하게 했다. 소속 오영의 책임자인 진영장도 5명 그대로였다. 그 밖에 정4품 경력(經歷)이 겸하는 종사관(從事官) 1명, 천총(千摠) 4명, 파총(把摠) 10명, 초관(哨官) 63명, 교련관(敎鍊官) 10명, 기패관(旗牌官) 71명, 군관(軍官) 15명이 더 배치되었다. 이는 속오법(束伍法)에 의거한 부대 편제에 상응하는 각급 단위부대를 통솔하는 직임들이었다. 다만 경력이 겸하는 종사관은 그 임무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찾아볼 수 없으나 군량 관리와 같은 주로 군수계통의 일을 관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본부 중군이 겸하는 중영을 제외한 나머지 4개의 외영은 유사시에 중앙의 조정이 피난해 오거나 강화부 자체가 외적의 공격으로 위험에 처했을 때 이를 외곽으로부터 방어하거나 지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변천

중간에 몇 차례 바뀐 것이 있었으나 가장 커다란 변화는 대원군의 집권 시절에 일어났다. 특히 병인양요나 신미양요 등의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외세들이 주로 서해의 수로를 이용해서 수도인 한성을 위협했기 때문에 이것을 저지하기 위해 강화도에 있던 진무영을 증강하였다. 우선 3,000명 정도의 병력을 확보하였고, 진무사의 지위도 외등단(外登壇)으로 격상시켰다. 이로 인해 1874년 8월 4일 구제로 복구될 때까지 경기 해안 일대를 방위하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를 물리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친정한 뒤에는 수도 외곽에 대한 방비보다 궁궐 수비를 강화함으로써 위상이 점차 낮아졌다. 마침내 경기 연해의 해양을 방비할 목적으로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이 1883년에 설치되면서 사실상 그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1887년 5월에 강화도의 군영을 친군심영(親軍沁營)이라고 명명했다.

의의

조선후기에 강화도를 중심으로 하는 한강 유역과 서해 일대의 수로를 방어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나아가 수도인 한성을 방위하는 데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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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성록(日省錄)』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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