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포사(討捕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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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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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토포사 |
한글표제 | 토포사 |
한자표제 | 討捕使 |
관련어 | 포도청(捕盜廳), 영장(營將) |
분야 | 정치/사법/치안 |
유형 | 직역 |
집필자 | 차인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토포사(討捕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현종실록』 11년 9월 2일 |
조선후기 각 지방의 도적을 수색·체포하기 위해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 또는 특정 수령이나 진영장(鎭營將)에게 겸임시킨 관리.
내용
조선시대 도적을 단속하는 치안 활동은 중앙에서는 포도청(捕盜廳)이, 지방에서는 토포사(討捕使)가 담당하였다.
토포사는 1561년(명종 16) 황해도·강원도 지방의 도적을 단속하기 위해 특별히 중앙의 관리를 파견하면서 비롯되었다. 인조(仁祖) 전반까지 토포사는 지방에서 도적이 발흥하면 파견되었다가 지역 백성의 침학을 고려해 일정한 활약 후에는 폐지되는 권설(權設) 기구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지방의 속오군(束伍軍)을 관리할 영장(營將)이 파견되었고, 현종대부터 영장이 토포사를 겸직하면서 지방 치안 활동의 주체가 되었다. 영장제는 진영장겸토포사(鎭營將兼討捕使)가 46명이고, 진무영장(鎭撫營將)은 5명으로 조직되었다. 각 지역의 영장은 경기 6, 충청 5, 경상, 6, 전라 5, 황해 6, 강원 6, 함경 6, 평안 9명이고, 진무영장은 강화부에 5명으로 편제되었다.
한편 1883년(고종 20) 대구·경주·안동·진주·공주·청주·홍주 등의 영장이 혁파되면서 각 고을의 수령이 겸임하게 되었다.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진무영(鎭撫營)과 각 도에 배치되었던 진영장 51명은 모두 폐지되었다.
용례
慶尙道盜賊處處竊發 各邑歲幣方物軍布之載來者 或被盜刼 閭里明火之賊 道路殺越之變 比比有之 道臣以聞 上命申飭討捕使等 另加譏察(『현종실록』 11년 9월 2일)
참고문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서태원, 「營將制의 설치와 운영 -17세기를 중심으로-」, 『역사와실학』4, 역사실학회,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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