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관(寫字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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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를 정사(正寫)하거나 정서(正書)하는 일을 맡은 관원.

개설

승문원(承文院)과 교서관(校書館), 오위(五衛), 규장각(奎章閣), 장용영(壯勇營) 등에 속한 기술직 관원이다. 사자관(寫字官)은 담당 관서에 따라 조금씩 역할이 달랐지만 기본적으로 초를 잡았던 문서를 또박또박한 글씨로 베껴 옮기는 역할을 하였다.

담당 직무

승문원 소속 사자관은 평소에는 제술관이 지은 외교 관련 문서를 정서하는 역할을 맡았고 중국이나 일본에 왕래하는 사행에 참여하여 현지에서 필요한 외교 문서를 정서하고 자문 점마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규장각 소속 사자관의 경우 왕가의 계보를 적은 접책인 어첩(御牒)과 왕이 지은 글인 어제(御製)를 베껴 쓰고 왕이 열람하는 문서를 읽기 편하도록 바르게 쓰는 일을 하였으며, 오위와 장용영에 속한 사자관은 해당 관서의 문서를 정서하였다. 해당 업무가 중요하였으므로 기술직 관원임에도 양반의 대우를 받아 의관지인(衣冠之人)이라 지칭되었고, 도성 안에서 말을 탈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승문원 소속 사자관의 경우 매년 1·4·7·10월에 제조(提調)가 주관하는 시험에 응시하여 우수한 자는 차차로 녹관(祿官)에 임명되었다. 사대 관련 중요 사안을 처리한 후에는 6, 7품의 실직에 제수되는 경우가 많았고 수령을 거치지 않아도 4품 이상으로 승천할 수 있는 특전이 있었다.

변천

기능상 조선 개국 초부터 담당 관원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처음 설치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며, 『경국대전』에 승문원이나 오위의 관원으로 수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성종대 이후에 편제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위에 속한 사자관은 모두 5인이었고, 승문원의 사자관은 영조대에 정원이 40인으로 확정되었다. 규장각에는 8인의 사자관이 있었고, 장용영 사자관은 1인이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육전조례(六典條例)』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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