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奎章閣)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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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규장각 |
한글표제 | 규장각 |
한자표제 | 奎章閣 |
상위어 | 관각(館閣) |
하위어 | 각감청(閣監廳), 이문원(摛文院), 봉모당(奉謨堂), 검서관(檢書官), 서향각(書香閣), 개유와(皆有窩), 열고관(閱古觀) |
관련어 | 규장각지(奎章閣志), 군서표기(群書標記), 초계문신(抄啓文臣), 외규장각(外奎章閣), 규장원(奎章院), 일성록(日省錄)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신병주 |
폐지 시기 | 1910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규장각(奎章閣) |
조선후기 왕실 도서의 보관·출판, 정치 자문 등을 담당하던 기관.
개설
규장각은 조선후기 왕실 도서관이면서 학술과 정책을 연구한 종2품의 관서이다. 1776년(정조 즉위) 3월 창덕궁 후원에 설치되었다. ‘규장(奎章)’이란 임금의 어필과 어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을 모아 두는 제도는 중국에서 유래한다. 숙종대 종정시(宗正寺)에 작은 건물을 별도로 지어 ‘규장각’이란 친필 현판을 걸고 역대 왕들의 어제와 어필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삼았으나, 규모는 크지 않았다. 이후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한 후 본격적으로 역대 왕들의 친필 서화(書畵)·고명(顧命)·유교(遺敎)·선보(璿譜)·보감(寶鑑) 등을 관리하였다. 또한 검서관 등의 관리들을 배치하여 차츰 학술과 정책 연구 기관으로 발전시켜 갔다.
규장각은 정조 때 다른 어느 기구보다도 중요한 정치·문화적 기구로 발전하였다. 검서관 직제의 설치,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의 실시로 정조는 규장각에서 인재를 양성했다. 규장각에서 양성된 학자들은 정조대의 문예 부흥을 주도하고 왕권 안정을 뒷받침하였다. 정조 사후 규장각은 그대로 남아 있기는 했지만 정치를 이끄는 기능은 사라져 왕실 도서관의 기능만 남게 되었다.
소장 도서는 이왕직(李王職) 도서실·조선총독부 취조국·학무국·경성제국대학 도서관 등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서울대학교 안에 독립된 규장각 건물을 마련하여 정조대부터 보관되어 온 규장각 도서들을 보관·관리하고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세조 때 양성지(梁誠之)가 그 설치를 주장했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1694년(숙종 20)에 이르러 세조가 친히 쓴 ‘奎章閣(규장각)’이라는 액자를 종정시(宗正寺) 즉 종부시(宗簿寺)의 환장각(煥章閣)에 봉안하고 역대 국왕의 어필·어제를 보관하는 장소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군주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규장각의 설치를 신하들이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 정조가 즉위하여 우문정치(右文政治)를 표방하고 정치 세력의 양성과 문화 정책 추진 기관으로 규장각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이후 규장각은 역대 도서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학문 연구의 중심 기관이자, 정조의 개혁 정책을 뒷받침하는 핵심 정치 기관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다. 정조는 “승정원이나 홍문관은 근래 관료 선임법이 해이해져 종래의 타성을 조속히 지양할 수 없으니, 왕이 의도하는 혁신정치의 중추로서 규장각을 수건(首建)하였다.”고 설립 취지를 밝혔다. 정조가 규장각에 하사한 네 개의 수교(受敎) 현판 글씨를 통해서도 규장각 설립 목적을 파악할 수 있다. 네 개의 현판 각각의 내용은 첫째,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말라[客來不起]” 둘째, “규장각 신하들은 재직 중에 관을 쓰고 의자에 앉는다[閣臣在職戴冠坐椅]” 셋째, “규장각 신하는 재직 중에 공무가 아니면 마루로 내려가지 말라[閣臣在職非公事毋得下廳]”, 넷째, “비록 고위 관리나 문형이라도 선생, 즉 규장각을 거쳐 간 학자가 아니면 규장각으로 올라올 수 없다[雖大官文衡非先生勿得升堂]”이다.
정조는 규장각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하여 당대 최고의 인재들을 발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관직이 높은 신하라도 함부로 규장각에 들어올 수 없게 하여 외부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였다. ‘객래불기’와 같은 현판을 직접 내려서 규장각 신하들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의 전당이자 유교 정치 이념을 전파하는 중심 기관으로 만든 것처럼, 정조 역시 규장각을 통하여 학문적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개혁 정치를 펼친 것이다. 정조는 규장각 도서 중에서 왕실의 어제, 어필, 의궤 등을 특별히 보관하기 위해 1782년 강화도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짓기도 했다.
조직 및 역할
『규장각지』에 의거하면 규장각신 6원(員), 규장각잡직(雜職) 35원, 규장각 이속(吏屬) 70인, 교서관 14원, 교서관 잡직 11원, 교서관 이속 20인으로 인원을 규정하고 있다. 가장 핵심인 각신(閣臣) 6원에는 제학(提學) 2인, 직제학(直提學) 2인, 직각(直閣) 1인, 대교(待敎) 1인이 포함되었다. 제학에는 홍문관 대제학이나 홍문관·예문관의 제학에 천거된 사람을 임명하는 등, 각신들은 삼사(三司)보다도 더 청요직(淸要職)으로 여겨졌다. 잡직 35원에는 직감(直監) 2원, 사권(司卷) 2원, 검서관(檢書官) 4원, 영첨(令籤) 2원, 검률(檢律) 1원, 사자관(寫字官) 8원, 화원(畵員) 10원, 감서(監書) 6원이 배치되었다. 이속 70인에는 서리(書吏) 10인, 서사리(書寫吏) 10인, 겸리(兼吏) 6인, 정서조보리(正書朝報吏) 2인, 각동(閣童) 4인, 직(直) 2인, 대청직(大廳直) 2인, 사령(使令) 15인, 인배(引陪) 4인, 간배(間陪) 4인, 조라치[照羅赤] 2인, 방직(房直) 2인, 수공(水工) 2인, 군사(軍士) 7인, 구종(丘從) 6인으로 구성되었다. 교서관을 규장각의 외각으로 두고 관원과 잡직, 이속을 배치한 것은 규장각의 출판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당파나 신분에 구애 없이 서얼 출신인 박제가·유득공·이덕무·서이수 등을 검서관으로 발탁하였다.
규장각의 기본 역할은 서적의 관리였으므로, 『규장각지』에도 서적에 관한 규정이 많다. 어제와 어진을 보관하는 절차에 관한 ‘봉안(奉安)’, 어제의 편찬에 관한 ‘편차(編次)’, 일반 서적의 편찬과 관리에 관한 규정인 ‘서적(書籍)’이 그것이다. 규장각 각신들은 비서 기관인 승정원의 승지 이상으로 왕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왕과 정사를 토론하였고 교서를 대신 작성하기도 하였으며 그 밖의 각종 정책결정이나 편찬·간행에도 깊이 관여하는 등 광범위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규장각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로 『일성록』 편찬이 있다. 『일성록』은 1781년까지는 국왕 개인의 일기였지만 그 이후부터는 규장각의 신하들이 기록하여 국가의 공식적인 일기가 되었다. 당시 이 일기를 기록했던 규장각은 그 무렵부터 왕실 도서관의 기능을 벗어나 학술 연구 기관으로 대대적인 개편을 이루게 되었다.
규장각의 기능은 점차 확대되었다. 승정원·홍문관·예문관이 맡았던,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근시(近侍) 기능을 흡수했으며, 과거 시험과 초계문신 제도도 함께 주관하였다. 초계문신은 37세 이하의 젊은 인재를 뽑아 3년 정도 특별 교육을 시키는 제도로서, 매월 두 차례 시험을 치른 후, 상벌을 내려 재교육의 기회를 주는 제도였다. 따라서 학문의 발전은 물론 정조의 친위(親衛) 세력 확대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규장각에는 각신들이 모여 연구하는 공간 이외에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다. 우선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근처에는 사무실에 해당하는 이문원(摛文院)을 두었다. 역대 왕들의 초상화, 어필 등을 보관한 봉모당(奉謨堂)을 비롯하여 국내 서적을 보관한 서고(西庫), 서책을 정기적으로 햇볕이나 바람에 말리는 작업인 포쇄(曝曬)를 위한 공간인 서향각(書香閣)도 두었다. 중국에서 수입한 서적을 보관한 개유와(皆有窩), 열고관(閱古觀), 그리고 휴식 공간으로 부용정이 있었다. 개유와와 열고관에는 청나라에서 수입한 5,022책의 『고금도서집성』 등을 보관하였는데, 이 책들은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 문물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규장각의 도서 출판 기능을 위해 예조 소속의 출판 전담 관서이던 교서관을 규장각의 속사(屬司)로 삼았다. 1777년(정조 1) 정유자(丁酉字), 1782년(정조 6) 한구자(韓構字), 1792년(정조 16) 생생자(生生字), 1795년(정조 19) 정리자(整理字) 등의 새로운 활자를 만들어 수천 권에 달하는 서적을 간행하였다. 많은 양의 국내외 도서가 수집·간행됨에 따라 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목록화하는 작업도 이루어졌다. 정조 시대 규장각에서 수행한 저술 활동 규모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책으로 『군서표기(群書標記)』가 있다. 『군서표기』에는 어제서(御製書)와 명찬(命撰書) 151종 3,960권이 기록되어 있어서, 정조 시대의 왕성한 연구·출판 성과를 잘 보여 준다.
변천
1776년 정조는 즉위하면서 규장각 창설을 명하였다. 이로써 어제와 어필 보존 역할만 담당하던 종부시의 부속 기관 규장각을, 학문과 정치의 중심 기관으로 재탄생시켰다. 정조대의 규장각은 문예 부흥을 주도하고 왕권 안정을 뒷받침하는 주요한 기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정조 사후 세도 정치 기간에는 정조의 정치 이념을 유지한다는 명목상 기능만 남은 채 실질적인 기능은 유명무실화되었다. 초계문신 제도가 사실상 폐지되고, 규장각의 실무를 담당하는 잡직들이 대폭 감축되었다. 사권·영첨·감서 등의 잡직이 폐지되고 각감과 검서관 각 1명, 사자관 8명, 화원 10명, 형조에서 파견된 검률 1명만 남게 되었다. 규장각의 활동은 대폭 축소되었고, 편찬물의 양이나 질도 현저하게 떨어졌다.
고종 즉위 후에는 종친부(宗親府)와 홍문관의 기능 강화를 통해 왕권을 높이려 했던 대원군의 정책에 따라 규장각은 그 위상이 크게 약화되었다. 대원군은 1864년 종부시를 종친부에 합하고 창덕궁에 있던 규장각의 현판을 종친부로 옮겨 규장각의 기능을 통합했다.
고종의 친정(親政) 이후 규장각은 고종이 추진한 개화 정책의 중심 기관으로서 개화 서적 수입을 주도하는 등 그 기능과 위상이 회복되었다. 고종대의 규장각 건물들은 경복궁에서는 수정전을, 창덕궁에서는 서향각을 중심으로 재배치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건물 배치는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정치를 선도하는 기능은 예전과 같지 않았고, 차츰 왕실 도서관의 기능만 남게 되었다.
규장각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궁내부에 소속되었고, 이듬해 규장원(奎章院)으로 변경되었다가, 1897년에 규장각으로 환원되었다. 규장각에 대변동이 일어난 것은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한 1907년 이후였다. 1907년 궁내부 관제가 개편되면서 규장각은 홍문관의 업무 기능을 통합하여 조직이 확대되었다. 일제는 1908년 9월 규장각 조직을 좀 더 정비하여 규장각 내에 전모과(典謨課), 도서과, 기록과, 문서과 등 4개의 과(課)를 설치했다. 이것은 일제가 규장각 도서에 대한 점검과 목록 작성의 필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규장각 조직이 확대되면서 규장각은 본래의 규장각 도서 이외에 홍문관·시강원·집옥재·사고(史庫) 등의 도서까지 관장하였다. 이들 도서들은 1909년 11월 경사자집(經史子集)의 분류 체계에 의거하여 『제실도서목록(帝室圖書目錄)』으로 간행되었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한 이후 규장각은 폐지되었고, 소장 도서들은 이왕직 서무계 도서 주임이 관리하도록 조치하였다. 이후 1911년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이 규장각 도서를 인수하였다.
이로써 규장각은 1776년에 창설된 지 15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외세에 의해 폐지되었다. 1922년 11월부터는 학무국에서 규장각 도서를 관리하다가, 1928년부터 1930년 사이에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1945년에는 규장각 도서들이 광복과 함께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서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인계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조선왕조실록』 태백산본과 정족산본 등 주요 국보급 도서들이 부산으로 피난하는 등의 수난을 겪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규장각지(奎章閣志)』
- 김문식·신병주 외, 『규장각: 그 역사와 문화의 재발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9.
- 신병주,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규장각 보물로 살펴보는 조선시대 문화사』, 책과 함께, 2007.
- 한영우, 『(문화정치의 산실)규장각』, 지식산업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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