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규장각(外奎章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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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2년(정조 6) 정조가 왕실 전적을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 강화부행궁 인근에 규장각의 외부 도서 보관처로 세운 곳.

개설

외규장각(外奎章閣)은 정조대에 세운 규장각의 강화도 전적 보관소라고 할 수 있다. 정조가 세운 규장각과 유사한 기능을 갖춘 기관은 세조 때부터 설립 계획이 있었다. 숙종대에는 선왕들의 어제(御製)는 물론 왕이 쓴 어필 등을 보관하기 위하여 왕실 업무를 관장하던 종부시(宗簿寺)에 소각(小閣)을 세워 규장각이라 이름 짓고, 숙종이 친필 현판을 써서 걸었다. 정조가 창덕궁에 세운 규장각은 왕실도서관이자 국가 최고의 공식적인 연구 기관으로 왕실의 주요 기록물과 중국에서 수입한 서적을 보관하는 장소였다. 따라서 당대의 석학들이 규장각에 모이게 되었고, 이들은 정조 시대 문예 부흥의 주역이 되었다. 정조가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지은 것은 왕실의 전적을 보다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왕실의 도서 중에서 중요한 어람용(御覽用) 전적을 외규장각에 보관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외규장각은 왕이 왕실의 전적을 보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구상한 도서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정조가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세운 것에는 숙종이 강화도에 왕실의 진전(眞殿)을 만든 전례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영조는 정조에게 유훈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강화도 장녕전(長寧殿)에 봉안하도록 했다. 장녕전은 1695년(숙종 21)에 영숭전(永崇殿)의 옛터에 중건한 건물로서 숙종이 1713년(숙종 39)에 어진(御眞)을 봉안한 뒤 매년 사맹삭(四孟朔)에 봉심할 것을 명하였다. 정조는 즉위년에 영조의 유지(遺旨)대로 어진을 봉안했다. 강화부는 행궁과 진전 등이 자리 잡은 왕실의 기념비적 공간이었으므로 정조의 외규장각 설치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강화도는 1231년에 고려 고종이 몽골의 침입을 피하는 장소로 이용한 이후 조선시대에도 외침에 대비할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선조 때 전주사고본을 강화도로 옮긴 것이나 정묘호란 때 인조가 보장처로 이용한 것도 동일한 이유였다. 강화도가 도성에서 멀지 않으면서 섬이라는 점이 방어에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외규장각은 변란이나 전란 시에 왕실의 전적을 안전하게 보관하려는 차원에서 세워졌으며, 왕실의 건재함을 외부에 상징적으로 알리기 위해 설립한 것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강화사고에 보관 중이던 어필과 어제를 외규장각으로 이관한 것도 왕실 전적만을 별도로 모아 상징화하려 한 것이다(『정조실록』 6년 2월 14일). 더욱이 정조는 의궤를 작성하면 규장각의 내각과 외각(外閣), 사고(史庫), 의정부, 춘추관에 1건씩 두라고 하여 왕실의 전례서를 보관하는 곳으로서 외규장각의 격을 높였다.

규장각은 정조가 즉위 초에 왕권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측근 세력의 확보를 위해 특별히 세운 것이다. 당시에 규장각은 왕 직속의 학술 연구 기관이었다.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신분적으로 국정에 참여할 수 없었던 서얼들을 발탁하였으며 이들을 친위 세력으로 양성하였다. 이런 와중인 1782년(정조 6) 2월에 도성에서 가깝고 전란의 영향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고려하던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신축한 것이다.

외규장각은 강화부행궁의 동쪽에 있었다. 강화부유수서호수(徐浩修)가 행궁의 동쪽 진전이었던 장녕전(長寧殿) 서쪽의 연초헌(燕超軒)을 헐어서 옮겨 세웠다. 재목과 기와는 강화부 소속 덕진창(德津倉)의 옛 재목과 기와를 옮겨 사용하였다. 공인(工人)의 요미(料米)와 장인(匠人)의 포목(布木)은 강화부의 회록미(會錄米)에서 100석, 병고기(兵庫記)의 목(木) 4동(同)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어제, 책보(冊寶), 보략(譜略), 지장(誌狀) 등의 762종 4,892책을 봉안하였다. 이후 소장도서는 1,212종 6,400책까지 늘었다.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서적들은 단순한 보존만이 아니라 국가 행사를 주관할 때 전례를 참고하거나 모사본이 필요할 때 가져다 사용하였다.

조직 및 역할

외규장각의 주요 관원은 제조 2명, 부제조 2명, 교리 2명, 박사 2명, 저작(著作) 2명, 정자(正字) 2명, 부정자 2명 등이었다. 이들은 교서관 소속의 관원이었다. 따라서 외규장각은 내각 같은 학술 기능보다는 전적의 보관과 출납이 주요 활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외규장각을 세운 서호수는 1781년(정조 5) 각신으로 『규장총목(奎章總目)』을 작성하였다. 정조는 존현각(尊賢閣) 옆에 정색당(貞賾堂)을 두고 세자 때부터 전적을 모아 보관하였다. 등극 이후에는 『도서집성(圖書集成)』 5,000여 권을 북경에서 구입하는 등 수천 권의 전적을 추가로 수집하였다. 당시 수집한 전적은 규장각 서남쪽에 열고관(閱古觀)을 만들어 보관하였으며, 열고관의 북쪽에는 서고를 건립하여 조선의 책을 저장하였는데, 총 30,000여 권이었다. 정조는 이 전적들에 대한 목록을 각신이었던 서호수에게 명하여 찬술하게 했다(『정조실록』 5년 6월 29일). 서호수가 목록을 완성한 이후 외규장각을 세우고 그 관리도 가능해졌다.

외규장각의 주요 역할은 규장각 전적의 출납과 포쇄(曝曬)였다. 외규장각의 전적은 강화사고의 책처럼 주기적으로 포쇄를 해야 했다. 포쇄는 좀이나 습기로 인한 기록의 훼손을 막기 위해 햇볕에 말리고 바람을 쐬어 보존하는 것으로 내각의 직각(直覺)과 대교(待敎) 중에 한 사람이 격년으로 내려가서 담당하였다. 또한 사고의 포쇄 과정과 동일하게 그 결과를 형지안(形止案)으로 작성하여 소장 전적의 보관 내역을 알 수 있도록 했다. 당시 형지안은 포쇄할 때마다 3부를 작성하여 1건은 내각, 1건은 외각, 1건은 서고(西庫)에 올렸다.

변천

외규장각은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소실되었다. 프랑스군은 강화도에 무력을 동원해 상륙한 뒤 강화부를 점령하고 외규장각 등의 전적과 보물을 약탈·방화하였다(『고종실록』 3년 10월 6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대전회통(大典會通)』
  • 『규장각지(奎章閣志)』
  • 『홍재전서(弘齋全書)』
  • 김문식 외, 『규장각:그 역사와 문화의 재발견』, 서울대학교, 2009.
  • 신병주,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규장각 보물로 살펴보는 조선시대 문화사』, 책과 함께, 2007.
  • 한영우, 『(문화정치의 산실)규장각』, 지식산업사, 2008.
  • 배현숙, 「江都外奎章閣考」, 『도서관학논집』6, 1979.
  • 신병주, 「조선후기 기록물 편찬과 관리」, 『기록학연구』1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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