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교(受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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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의 해당 관청이 국왕의 명령인 교[지](敎[旨])를 받아[受] 준행하는 의미로 개별적인 법이며, 나아가 수교는 법전 편찬의 기초가 되는 개별 법령임.

개설

조선은 법치주의를 표방하여 건국 초기부터 법전 편찬에 착수하였다. 조선에서 최고 주권자는 국왕이며, 따라서 입법권도 국왕에게 있다. 개별 법령은 특정 사안에 대한 국왕의 결정 내지 판단이다. 『경국대전』「예전」 입법출의첩식(立法出依牒式)조에서 공식적인 입법 과정을 규정하고 있다. 예조가 입법 과정 전반을 관장한다. 먼저 담당 관서에서 법안을 예조로 보내면, 예조에서는 국왕의 재가를 받아 사헌부와 사간원에 보낸다. 양사에서는 법안을 검토하여 합당하면 관례대로 처리하라는 의견을 예조로 보내고, 예조에서는 국왕의 재가와 양사의 서경(署經)을 받은 사실과 함께 법안을 제안한 부서로 보낸다. 이렇게 하여 개별 법령이 완성이 된다.

그러나 입법출의첩식조에 의한 법령보다는 개별 사안에 대한 국왕의 결정이 법령으로 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특정한 사안에 대해 담당 관서에서 안을 제시하고 조정에서 이를 검토하여 의견을 내며 최종적으로 국왕이 이를 승인하여 하나의 법조문이 완성된다. 제정법의 궁극적 근원은 국왕의 명령이다. 특정 사안에 대한 최종 결정, 즉 국왕의 명령을 ‘교(敎)’라고 한다. 이것이 형식화된 것을 ‘왕지(王旨)’, ‘교지’라고 하고, 각 관청에 하달된 교지를 시행하는 의미에서 ‘수교(受敎)’라고 하였다. 수교는 관청을 통하여 백성에게 시행되도록 내려진 법적 성격을 지닌 국왕의 명령을 일컫는다. 이러한 개별적·구체적 수교가 일반적인 법조문으로 되면 조례(條例), 조령(條令), 조건(條件) 등으로 불리어졌다. 법을 집행하는 관청의 입장에서 보면 교지를 받아서 집행하는 것이므로 ‘수교(受敎)’라고 하였다. 즉 수교는 관청을 거쳐 백성과 관리들이 준수하고 시행해야 하는 법적인 성격을 지닌 국왕의 명령이다. 육조를 비롯한 모든 관서는 담당 사무에 대해 개별적으로 입법을 제안하고 국왕의 재가를 받으면 수교, 즉 법으로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교의 수는 아주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해를 거듭할수록 법이 많아져 동일한 관서에서 제안한 전후의 법이 모순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서로 다른 관서에서 각각 발의한 법이 다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백성뿐만 아니라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조차도 법에 대해 혼동을 일으키게 되었고, 법을 제정한 원래의 의도를 실현할 수 없게 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법의 상호 모순과 혼돈을 피하고 법의 통일을 도모하는 것이 바로 법전 편찬이다. 법전 편찬은 다양한 수교를 통일적으로 종합하여 정리하는 과정이다.

내용 및 특징

1397년(태조 6)에 편찬된 『경제육전(經濟六典)』은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의 수교를 집성한 것이다. 이후 수교는 계속 늘어나 태종은 『원육전(元六典)』을 편찬하면서 ‘조종성헌존중주의(祖宗成憲尊重主義)’ 원칙을 확립하여 『경제육전』을 우선하였다. 이어서 세종대에는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을 편찬하면서 기본적인 법전 편찬 원칙을 확립하였다. 영구히 지켜야 할 법[經久之法]은 ‘전(典)’에 수록하고, 일시적 필요로 시행할 법령(權宜之法)은 ‘록(錄)’에 수록한다는 ‘전과 록’의 구별 원칙이다. 성종대 편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조종성헌존중주의’에 입각하여 ‘전’만 종합한 법전이다. 그러나 『경국대전』 편찬 이후에도 수교는 계속 늘어났으며, 후대에 어느 정도 구속력이 있는 수교를 종합하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대전속록(大典續錄)』,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이 편찬되었다. 이러한 법전 편찬 이전 단계에서 수교를 집성할 필요가 있어서 수교를 육전에 따라 내용적으로 분류하여 시대적으로 배열한 법서가 간행되었다. 『각사수교(各司受敎)』, 『수교집록(受敎輯錄)』,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등이 그 예이며, 여기에 수록된 수교는 영조대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 반영되었다.

또한 각 관청에서는 수시로 제정되는 수교를 업무의 연속성과 효율성을 위하여 개별적으로 정리하였다. 이를 『수교등록(受敎謄錄)』이라고 한다. 『수교등록』은 특정 시기에 그때까지의 수교를 업무에 참고하기 위해 정리한 것으로 『수교집록』 등과 같이 수교를 종합·편찬할 때의 기본 자료가 되는 것이다. 『수교등록』에 수록된 수교 가운데 일종의 관례 내지 업무 처리 기준으로 된 것은 한 단계 격상되어 이를 『수교정례(受敎定例)』라고 한다. 『수교등록』에 수록된 수교는 주로 후기의 것이 많으며 정조대와 순조대 그리고 고종대에 편찬되었다. 여기에 수록된 수교는 1865년(고종 2)에 편찬된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반영되었다.

수교는 일반·추상적으로 규정된 『속대전』이나 『대전회통』 등 법전의 규정의 입법 배경 등을 이해할 수 있어서 법 해석에 도움이 되며, 아울러 당시의 사회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전과 록, 수교의 관계는 ‘수교→록→전’의 원칙적인 우선순위는 그대로 관철되어 대전과 록, 수교가 기본적인 상하 관계를 유지하였다. 『대전속록』, 『수교집록』 등 ‘록’으로 편찬된 것은 비록 그 뿌리는 수교이지만 개념적으로 더 이상 수교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고, 더구나 수교나 록을 발췌·정선하여 『속대전』, 『대전회통』 등 ‘전’으로 편찬하면 법적 권위와 지위는 형식적으로도 최고 법 규범으로 확고해졌다. 따라서 그 시원적 법원(法源)은 수교나 록·전이 모두 같은 뿌리이지만 그 형식적인 지위와 성격은 이처럼 확연하게 구별된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속록의 효력은 수교에 의해 제한을 받았다. 때로는 대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록이나 수교가 전의 하위법의 역할만을 한 것은 아니라, 수평적인 보충법의 기능도 함께 가졌다. 특히 정치사회적 상황의 변화에 따른 시대적 요청에 따르기 위해 속록이나 수교의 규정이 대전보다 가중(加重)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그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 잠정적이나마 대전의 효력을 개폐하는 것이다.

변천

‘교(敎)’는 국왕의 명령이며, 황제의 명령은 ‘제(制)’이다. 고려는 천자국으로 ‘제’를 사용하였으나, 원 간섭기에는 제후국으로 되어 ‘교’를 사용하였다. 조선초기에는 명과의 책봉(冊封) 관계에서 여전히 ‘교’를 사용하였다. 초기에는 수판, 조례, 조령, 조건, 판지(判旨) 등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후기에도 간헐적으로 사용되었고, 태종대 이후는 주로 ‘수교’가 사용되었다. 이는 법전의 명칭 등에서 알 수 있다.

의의

수교는 국왕이 개별 사건에 대한 처리 방침이나 판단으로 입법의 원천이 된 것이다. 수교는 법치주의를 지향하고 지속적으로 법전을 편찬한 조선시대에 법전 편찬의 기초가 되는 법령의 형식이다. 따라서 전 시대에 걸쳐 법에 의한 지배를 관철할 수 있는 제도적 토대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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