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部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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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오위(五衛)에 소속된 종6품 무관직으로 위(衛) 아래 각 부(部)의 책임자였으며, 후기에 오위가 폐지된 뒤에는 내삼청으로 이속되었고 참외관으로 정해짐. 포도청에도 소속되어 방범 활동 등에 종사했고 북한산성에서는 성문 관리를 담당했음.

개설

조선의 중앙군 조직인 오위는 오위진법(五衛陣法)을 기반으로 각 위마다 5부를 거느렸다. 그 부를 통솔하는 책임자로 부장을 두었다. 정원은 부의 수와 일치하여 25명이었다. 직속 상관인 위장(衛將)이 겸관이었던 것과 달리 부장(部將)은 전임이었다. 궐내의 숙직 및 순찰, 군사 훈련 등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휘하의 병력들을 통제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 이후에 창설된 포도청에서는 주로 방범 활동을 하거나 불순한 사람들을 적발하는 일 등을 맡았다. 이런 업무를 효율적으로 집행하기 위해 좌·우 양청에는 각각 부장 4명, 무료부장 26명, 가설부장 12명을 두었다.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특별히 성문을 관리하기 위해 성문부장과 수문부장을 배치하였다. 처음에는 경리청에 소속되었으나 후에 총융청으로 합속되었다.

담당 직무

1) 오위제에서의 직무

『경국대전』에 따르면 당시 중앙군 조직의 핵심이었던 오위 예하의 25부(部)를 거느린 무관직으로, 종6품이었으며 정원은 25명이었다. 오위 편성의 근거가 되었던 것은 1451년(문종 1)에 도입된 오위진법이었다. 이에 따르면 대장(大將)은 5위를, 위장은 5부를, 부장은 4(統)을, 통장(統將)은 관내 여수(旅帥)를, 여수는 5대(隊)를, 대정(隊正)은 5오(伍)를, 오장(伍長)은 5명을 통솔한다고 했다(『문종실록』 1년 6월 19일). 그러므로 각 위는 예하에 5부씩 거느렸는데, 1457년(세조 3)에 중앙 군제가 오위제로 개편되면서 조직과 해당 관직이 정식으로 설치되었다.

직속 상관에 해당하는 위장이 모두 겸관인 탓에 휘하의 병력들을 철저하게 장악하기 어려웠던 것에 비하여 부장은 전임관이어서 상황이 약간 달랐다.

주된 직무는 평상시 궐내의 숙직과 순찰, 군사 훈련에 참여하는 것 등이었다. 평상시 궐내 입직(入直)을 할 때 오위는 각 1부씩 동원하되, 전날 저녁에 병조에서 장소와 시간을 나누어 정해 왕의 허락을 받아 도총부에 공문을 보내 실시하도록 했다. 자연히 해당 부의 인원을 거느린 부장이 책임지고 임해야 했다.

아울러 궁궐 안을 위장과 함께 군사 10명을 거느리고 시간을 나누어 순찰한 뒤에 이상 유무를 왕에게 직접 보고했다. 한편 왕이 궐 밖으로 행차하여 행재소(行在所)에 머물 때에는 대장 지시에 따라 위장과 함께 외진(外陣)을 군사 10명을 거느리고 순찰했다. 왕이 친히 검열[大閱]하기 위하여 궐내에서 군대를 모을 때 치는 큰 종인 첩종(疊鍾)을 울리면 오위의 군사는 광화문 앞 길에서 종루(鍾樓)와 흥인문(興仁門)에 이르기까지 늘어서야 했다. 이때 왕명을 받은 위장의 인솔 아래 참여했으며, 입직하지 않은 자들도 모두 광화문 앞에 모여 명령을 기다렸다.

또한 당직을 마치고 나오는 군사는 당번 군사 대신 순찰할 때를 제외하고는 3일 중 1일은 훈련원에 나아가서 진법(陣法)이나 활쏘기를 익혀야 했다. 이때 소관(所管) 부장은 훈련원의 당하관과 함께 이를 점검하고 시험하여 특별 근무 일수를 매겨주되 불참한 자를 적발해서 처벌했다. 그런데 궐 밖 행재소에 머물고 있을 때, 맡아 관리하는 범죄자 가운데 태형(笞刑) 이하를 받은 자는 직접 결정하여 처단하고 장형(杖刑) 이상은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궁(離宮)이나 관청 건물, 개인 집 등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종을 치고, 이것을 접한 도총부에서는 즉시 왕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입직한 보병을 거느리고 달려가서 불을 끄게 했다.

2) 선발 방식

전임관으로서 실제 병력을 거느리고, 여러 가지 직무를 맡은 요직이었던 관계로 그 선발 또한 엄격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비슷한 위치의 도총부 당하관이나 선전관(宣傳官)과 동일했다. 우선 활쏘기 시험에서 득점한 화살 수가 4발 이상이고 강서(講書) 시험에 합격해야 뽑았다. 만약 현임 내금위라면 다만 강서 시험만으로 뽑았는데, 무예의 경우도 같았다.

활쏘기 시험 과목은 목전(木箭)으로 표적 거리는 240보(步)와 180보가 있으며, 편전(片箭)으로 130보, 기사(騎射)가 있었다. 만약 240보 시험에 1발 이상을 득점하면 강서 시험만으로 뽑았다. 그런데 180보에는 반드시 1발 이상을 의무적으로 맞혀야 했다.

강서 시험에서는 『병정(兵政)』·『진법(陣法)』·『병장설(兵將說)』 중에서 한 책에 ‘통(通)’의 성적을 받아야 하고, 『무경칠서(武經七書)』·『병요(兵要)』 중에서 스스로 선택한 책에서 ‘약(略)’ 이상의 성적을 받아야 했다. 무반 청요직(淸要職)으로 간주되었던 선전관과 같은 방식으로 뽑았다는 점에서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그 직을 역임했던 자의 아들로 나이 20세 이상인 자는 음자제(蔭子弟) 취재의 응시를 허용하며, 합격자를 임용하되 녹사(錄事)가 되고자 하는 자는 그것을 들어주는 특혜를 베풀었다.

변천

1) 양난 후 오위제 폐지와 소속 기구의 변경

임진왜란 이후 중앙 군제의 대대적인 변동으로 오위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속대전(續大典)』에 이르러 오위의 병제(兵制)는 모두 혁파하고 관명(官名)만 남겨두되 부장은 번을 나누어 입직과 순찰, 순경(巡更) 등을 하도록 했다. 4명이 동서남북 네 곳으로 나누어 숙직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런데 오위가 혁파되었으므로 소속을 내삼청으로 옮겼다. 정원 25명 중에서는 참외(參外) 14명, 남행참외(南行參外) 1명이 있는데, 남행은 음관(蔭官)을 가리킨다. 참외관은 8품의 녹봉을 받았으며, 근무 일수 600일이 차면 6품으로 승진시켰다. 참외관 한 자리는 도목(都目) 때마다 금군 중에서 추천하여 취재 시험에 합격한 자를 위에 알려 임용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참외 11명, 남행참외 1명 등은 종9품으로 하고 근무 일수가 720일이 차면 6품으로 승진시켰다.

2) 포도청의 제도적 완성과 부장의 설치

도적과 간악한 소인을 색출하여 체포하거나 야간 순찰 등을 관장하는 포도청은 『경국대전』의 편찬 후에 창설되었다. 그 뒤 제도 정비 과정을 거치며 『속대전』에 이르러 좌·우 양청(兩廳)을 두도록 규정되었다. 양청 각각에는 부장 4명, 무료부장 26명, 가설부장 12명을 두었다. 그들의 역할 분담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도적의 포획과 도난 및 화재 예방을 위해 순찰 등을 분담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부장은 보이지 않으며 군관 각 70명, 군사 각 64명씩을 둔 것으로 되어 있다. 부장직을 존속시켜야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3) 북한산성 축조와 성문 관리를 위한 부장의 배치

1711년(숙종 37)에 북한산성을 쌓고 이듬해 경리청을 설치하여 산성의 사무를 관장하도록 했다. 성문부장 3명을 배치하여 관리하게 했다. 그러나 점차 업무 중복 등의 이유로 혁파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되었다. 1747년(영조 23)에 군영 체제를 재정비하면서 총융청에 합속되었다. 하지만 수문부장 1명, 성문부장 3명은 그대로 배치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전기편』, 육군본부, 1968.
  • 천관우, 『근세조선사연구』, 일조각, 1979.
  • 이상식, 「포도청의 설치에 대한 고찰」, 『역사학연구』 7, 1977.
  • 이현수, 「18세기 북한산성의 축조와 경리청」, 『청계사학』 8, 1991.
  • 차문섭, 「군사조직」, 『한국사 23 -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국사편찬위원회, 1994.
  • 차인배, 「조선시대 포도청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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